"동성결혼"에 대한 조그마한 단상
게이, 레즈비언. 이 말을 듣게 되면 당신은 어떤 느낌부터 드는가? 아니, 전통적으로 종법제도가 뿌리내린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은 너무도 자명할 것이다. 결혼은 곧, 자손 번식을 위한 행위. 이 도식이 굳어져버린 이곳에서는 어떠한 금기도 동성애의 관념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사랑, 그것은 일종의 양념일 뿐이다. 결국 사랑의 결실은 결혼이며, 거의 모두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여기에서는 사랑이 결혼에 우선하는 것이 아닌, 결혼이 사랑에 우선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이러한 결혼관은 “사랑”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마치 규정된 개념처럼 여기게 하였다. 포플러 나무 아래, 수줍은 “선남선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도 그들의 사랑을 이어가며, 결국 결혼하여 행복한 가족을 구성한다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애써 자신의 결말 선택지 속에서 삭제하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 선남선녀를 “선남선남” 또는 “선녀선녀”로 슬그머니 바꾸어보라. 어떠한가?
사랑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이 자유롭게 그 구체성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물며, 모든 이들의 자유 보장을 헌법에 명기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오죽할까? 자유라는 이념이 인정된 것은 다원화된 개인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함에 다름 아니다. 즉 모든 사람이 태생적으로 다 동일한 성향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한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성향을 가지기를 “바라는” 전통사회와의 가장 분명한 경계를 형성한다. 과거의 백성과 현대의 시민. 그것은 정해진 이념을 수렴하는 사람과 발산하여 이념을 수립하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다.
다원화된 개인들이 구성하는 이 사회에서, “혐오”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사람이 어떠한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전제하여, 그에 반하는 경우를 목도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바로 “혐오”일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치는 곧 “일반 원칙”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공존하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 일반 원칙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구체적인” 보편적 가치란, 일반 원칙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얼마든지 가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획일화된 봉건사회에서 출발한 보편적 가치가 “상수”라면, 다원화 사회에서 출발한 보편적 가치는 “변수”이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보편적 가치는 이 둘 중에서 과연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모든 사람이 이래야 한다는 사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각기 인정하는 사회이다. 이는 근대라는 질곡을 거치면서, 거침없이 요동치는 변화와 발전을 수용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동성결혼도 그 사회적 변화의 한 양태이다. 그럼에도 단지, 전통적 결혼 관념에 얽매여, 그들의 "다름"을 우리의 "같음"에 억지로 끼워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변화는 발전의 충분조건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변화는 곧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또한, 시대는 분명히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전통과의 불편한 공존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