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직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젊다면.

騎虎之勢 2010. 10. 26. 20:45



이양수 교수 著

1.

  책은 과거 문명의 총아였다. 책은 시각중심의 문명이다.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고 관조하는 삶의 전형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영상매체의 시대다. 영상매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단연 촉각이 시각보다 우선한다. 촉각적인 감수성이 시각적 이미지를 앞선다.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촉각 중심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그 차이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로 비유한다. 연극배우는 직접 관객 앞에서 자기 배역을 소화한다. 그는 관객과 호흡하면서 돌발 상황에도 대처해야 한다. 관객의 표정을 살피고 연기의 흐름과 강약을 스스로 조절한다. 연극의 독특한 맛을 연기자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배우는 관객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의 표정을 살펴 연기의 흐름을 조절하지 않는다.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배역을 소화한다. 각각의 시퀀스는 전문 편집자의 손으로 손질된다. 배우는 시사회에서 관객의 최종 평가를 기다린다.

 

  시각중심, 촉각중심의 문화에서 관객의 태도 또한 다르다. 연극의 관객은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작중인물을 이해한다. 관객 입장에서 기자의 모든 제스처와 연기는 부분보다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들이다. 관객은 연기자와 호흡하고 자기감정을 토로하고, 생각에 잠길 수 있다. 행위들을 보고 작중인물의 성격을 평가한다. 영화의 관객은 사뭇 다르다. 카메라는 배우의 연기를 확대한다. 불현듯 배우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세세한 변화를 추적한다. 배우가 자기배역을 통제할 수 없듯이. 관객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따라가야 한다. 시퀀스의 연속성은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촉각의 감수성은 작중인물을 평가하기도 전에 다른 이미지를 따라가도록 종용한다. 이때 시각의 비평적 위치가 촉각의 감상적 지위에 굴복한다. 생각이 즉각적인 반응에 자리를 내어준다. 몸의 느낌이 머리의 생각보다 앞선다.

 

  늘 변화의 중심에는 주역이 있기 마련이다. 촉각중심의 문명은 산업과학기술의 획기적 발달에 힘입고 있다. 라디오의 묘미는 감정표현은 느리지만 돌이켜볼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물론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는 타인에 의지하고 타인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마실, 사랑방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키워드다. 휴대폰, 인터넷, 엠피쓰리, 아이폰으로 이어지는 현대문명에서는 발명품이 보여주고 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알아낸 자료에 합리적인 설명을 부여하고, 그것이 곧 이야기로 소통된다. 그런 탓에 모든 사람은 문명의 발명품에 나타난 아바타 같은 인물이 되고자 갈망한다. 문명의 소비자인 대중은 이런 변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술을 터득한다. 컴맹, 기계치는 문명의 이기를 향유할 줄 모르는 루저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각 개인은 자기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드러내려고 혈안이 된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스쳐 지나간 이미지에 숨겨진 암호들도 예리한 감수성으로 읽어낸다. 새로운 감수성은 자기표현의 방식도 바꾼다. 획일적인 추상명사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특한 형용사,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충실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곧 감각이 자기이다. 여기에는 다양성, 다원주의라는 정치적 수사들이 늘 따라다닌다. 우리 시대는 풍요로운 감수성의 시대이다. 새로운 음식의 맛을 탐하는 미식가처럼 아직 느끼지 못한 오묘한 맛을 찾아 나선다.

 

  세상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이러한 감수성의 문명, 다양성의 문화는 풍요로움의 산물이다. 다양성을 존중할 줄 아는 체제에서 자라난 결실이다. 상큼한 사과는 비옥한 토양과 따뜻한 볕이 필요하다. 모래밭이나 그늘진 곳에서 탐스러운 사과를 기대할 수 없다. 문명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풍요의 산물처럼 다양한 감수성과 정치관을 즐기지만, 환경과 체제의 갑작스런 변화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예리하던 촉수도 작동하지 않는다. 무뎌지는 감수성에 무력감이 덮친다. 변화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성공은 나의 패배처럼 들린다. 자기만의 개성은 일순간 보릿자루마냥 내팽겨진다. 대신 자기 자신의 실존이 무겁게 다가온다.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그랬다. 카페에서 예술, 진리, 인생을 논하던 그들에게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과 패배감이 덮쳤다. 그들의 유일한 비상구는 자기 자신의 믿음이었다. 유한한 삶을 개척하는 진정성이었다.

 

  지금 대학생은 촉각중심의 세대이다. 참고 견디는 인내의 미덕보다 자기표현의 진솔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표현은 큰 장점이다. 경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항상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야심만만한 세대이다. 그러나 세계의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닌 당장 생존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의 심정이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 전투로 향하는 심정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분명 야심만만한 세대는 이 전투에서 이길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세대임을 소리치고 유감없이 그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불청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커져가는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묘책이 있는가? 21세기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대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새로운 도전에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보고 싶은 물음이다.

 

2.

  대학생활은 늘 해방감으로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간섭 없이 생각대로 마음껏 하고 싶은 자유가 먼저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소망은 있다. 누구나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은 욕망은 있다.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싶은 욕망.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서 찾은 이유와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싶은 욕망. 스스로 결정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은 욕망. 스스로 목표와 계획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욕망 덩어리가 인간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자유가 없다. 인간만이 자유를 갖고 향유한다.

 

  자유가 문제이다.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아직 충분하지 않는 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유 자체를 완벽하게 실현시키지 못한다. 생각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방식을 바꿀 뿐이다. 조선시대의 선조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보라! 분명 우리의 후손들도 자유를 꿈꿀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과학문명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를 꿈꾸고 실현시킬 수 있다. 문명의 도구는 자유의 속박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문명을 오용하는 자도 사람이다. 자유만이 자유를 속박하고 허용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 그 역설은 물질적 풍요를 자유의 실현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다. 우리는 자유의 속박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든지 자유를 속박하는 기술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현 세대는 산업과학기술에 친숙하다. 현 세대는 과학을 부릴 줄 알고, 더 전진시킬 줄 안다. 아버지는 컴맹이지만, 아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낚을 줄 안다. 과학기술에 너무 젖으면 만성화되는 위험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비판의 촉수를 잊어버리듯이, 비판하길 꺼려한다. 없으면 불편할 뿐이다. 과학의 풍요는 자기 자신의 문제도 기술의 문제를 풀 듯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다. 상황도 중요하지 않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양질의 토양이 아니면 꽃 봉우리는 결코 피어나지 못한다. 안 되면 다른 곳에서 하면 되는데 라는 식으로 도피처를 찾는다. 역사적 조건은 그렇지 못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숨 푹 자고 깨어나도 여전히 똑같다. 현실은 꿈이 아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 평범한 사실이 인간의 조건인 셈이다.

 

  현 세대에게도 이 역사적 조건이 있다.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서 있는 땅, 그 조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과 관조는 이 조건을 벗어나는 꿈과 같다. 각박한 현실을 벗어날 비전인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라면 이 땅을 축축하고 생기 있게 할 하늘과 태양을 보는 것이다. 막연한 느낌은 비전을 가질 수 없다. 느낌은 육신의 감각에 민감할 뿐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따뜻함을 그리워할 뿐이다. 땅의 온기를 찾아다닐 뿐 왜 그런지, 어떤 대안이 있는지 모른다.

 

  대학생활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행동과 말을 가능하게 한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조건에 갇힌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서 여전히 묻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왜 강의를 듣는가? 취업을 위해서? 취업은 결과이지 목적일 수 없다. 인생의 황금기에 이 좁은 공간에 갇힌 이유가 무엇인가? 목적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계속 질문을 던지자. 왜 사는가? 왜 공부하는가? 왜 이 사회는 우리에게 간섭이 많은가? 사회는 무엇인가?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풀리는 게 없다. 에라, 모르겠다. 마음껏 즐겨보자. 이런 기분으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3.

  현대사회의 역사적 조건은 특이하다. 자유가 무한정 허용되는 듯하면서도, 막상 그 자유는 항상 막다른 골목에서 내린 필연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내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상실된다. 무력감만 커져간다. 왠지 모르게 자꾸 주눅이 든다. 타인을 친구로 보지 않는다. 타인은 그저 나의 경쟁대상일 뿐이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오직 나만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현대인은 개인들로 쪼개져 있다. 서로를 연대시켜 줄 공통의 것이 없다. 찰스 테일러는 이런 현상을 “개인의 파편화 과정”이라 불렀다. 현대사회의 불안은 여기에 있다. 현대사회는 무리 짓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의 사회다. 무리 지움을 일종의 속박으로 여기고 있다. 파편화는 끝이 없다. 자꾸 내면으로 도망간다. 또 다른 이면의 공간으로 달아난다. 개인의 내면은 유일한 안식처다. 자기 세계에서 영원히 꿈을 꾸듯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타인이 지옥이라 말한 사르트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 모두는 타인을 품지 않고 자기의 작은 세계에 만족하고 있다.

 

  자기 세계에 갇히는 건 삶에 안주하는 동시에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편한 사람만 만나고 편한 말만 하는 세상은 사람냄새가 점점 사라진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그저 몇 사람만 알고 죽는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남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타인은 정말 지옥인가? 나를 도와주고 꿈을 꾸게 하고, 같이 행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는 아닐까? 현대인에게 ‘연대’는 낯선 말이다. 마치 골동품에 피어난 푸른 녹처럼 느껴진다. 자기를 벗어나 남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남도 나다. 나처럼 그도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다. 나처럼 자기 자신의 것을 갖고 싶고, 친구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진정성의 참뜻은 결국 서로의 인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진정성을 확인할 공통의미가 무뎌진 세상에 살고 있다. 공통의미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이상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이 공통공간은 말하자면 말과 행동을 통한 합심의 공간이다. 서로 선의의 경쟁 안에서만 생겨난다. 서로 자신의 독특성을 보여주고, 인정할 때 존재하고 유지된다. 그 의미의 상실은 내 작은 세계로의 회귀이다. 근원적 불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의 기분처럼 말이다.

 

  88만원 세대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다. 뿔뿔이 흩어지면 남는 것은 개인의 자족공간이고, 이 공간은 늘 타인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자기 진정성은 원자처럼 단순화된 개인의 자질로 평가되지 않는다. 타인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평가받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의 공간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되고, 새로운 공통성을 찾는 데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88만원 세대라는 집단적 평가에 앞서서 스스로는 완벽한 인격체이고 가능성이다. 대학생활에 허용된 것은 삶의 이해관계에 얽매임이 아니라 그 해방이다. 물론 개인의 이해가 전혀 없을 순 없다. 그럼에도 대학은 이해에 얽힌 집단이 아닌, 뜻을 공유하려는 희망의 집단이다. 뜻이 통하는 친구들. 철학자들은 이런 뜻의 공동체를 우애의 공동체(philia)라고 불렀다. 이런 공동체에는 정의도 필요하지 않다.

 

  혹자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현실을 모른다 폄하할 것이다. 맞다. 분명 이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상의 힘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상 없는 사회는 늘 현실에 수긍하는 사회이다. 싸워야 할 어떤 당위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을 꿈꾸는 사회는 다르다. 그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않고 현실과 싸운다. 적어도 도전한다. 현실과 이상의 팽팽한 긴장. 이것이 젊은 세대가 누릴 특권이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좋은 기회다.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다.

 

4.

  자기 자신의 것을 만드는 것. 삶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탈을 꿈꿔야 한다.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자기만으로 감수성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안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는 능력을 중요시했다. 특히 이야기하는 능력을 매우 특별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야기를 꾸밀 수 있는 것은 자기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자기만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일탈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향유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대학 시기는 이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적합한 시간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당장 현실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기 시간을 허용 받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찾아가는 시간이라 생각하자. 일탈을 꿈꾸는 여유를 허용 받은 것이다. 창조적 일탈을 위한 시간이다. 이것이 젊음의 특권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창조적 힘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창조적 힘은 지능이 아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면서 터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습관적 행동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조적 힘은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과 관련 있다.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자기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 개방은 알려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질문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그게 그거다. 그러나 물으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알았던 기존 관점의 맹목성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대중들의 관점을 의심하고 홀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는 전체의 시각이 필요하다. 전체의 시각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은 생각이 자라는 뿌리이다. 시련은 생각을 키우는 반작용의 힘이다. 생각하는 지성은 관념을 키우고 관념은 행동의 힘을 키운다. 적어도 자기 진정성은 행동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힘은 세상의 제도를 바꾼다.

 

  관념의 유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념은 절망을 좌절로 만들 수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은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상상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현실을 창조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그래서 가능성의 열정은 필연성에 우선해야 한다. 희망은 이 가능성의 힘, 새로운 삶을 위한 기대를 가리킨다. 내 희망, 우리 희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일깨우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희망, 이 어두운 시대의 등불이다.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이 원색적인 회의에 이제 답할 차례다.

 

5.

  예부터 책읽기는 대학생활의 특권으로 여겨왔다. 책읽기는 옛사람을 만나고 동시대인을 만나는 카페이다. 책읽기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미팅장소다. 책읽기는 곤욕스럽다. 항상 인내와 끈기를 요구한다. 타인의 경험을 읽어내는 일은 오랜 시간과 끝 모를 이해를 필요로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단호하게 평가하긴 쉬어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감각적인 기쁨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는 과정은 묘한 즐거움을 준다. 지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꿈틀거림은 자기 자신의 활동 자체가 아닐까?

 

  즐거움은 일종의 창조적인 반응이다. 거북스러운 일도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힘들수록 그 희열은 커지듯이, 이전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값진 것이다. 고전 읽기는 천재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꼭 고전을 읽어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냥 즐길 수 있는 책을 읽어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맞다. 책을 읽는다는 데는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것은 생각하는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단지 시간 때우기 라면 무슨 책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알 수 없는 길을 가는 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알아야 할 때가 많다.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둠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캄캄하다. 그러나 익숙한 어둠은 얼마든지 헤쳐 간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번 생각한 것은 묘한 힘을 지닌다. 한 번 생각한 것은 닥치면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일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새롭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겠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에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낯섦도 맞부딪치다보면 친숙해진다. 낯섦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뜻밖의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만족하지 않는 것은 놀라움이다. 놀라움은 새로움을 배우는 디딤돌이다. 놀라움은 신비스런 능력이 아니다. 가까이에 있어 친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갑작스런 낯섦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주위의 모든 것, 내 삶, 내 존재를 느끼게 한다. 되풀이가 아닌 항상 새로움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의 삶은 일종의 도약대이다. 일상의 관점을 넘어 진정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학생활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 허용된 시간에 값진 것을 찾는 것. 살아있는 징표를 찾는 것. 회의라는 무기를 마음껏 이용하는 것. 아직은 삶이 남아있다고 외치는 것. 젊음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구세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 감히 알려고 하자.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칸트의 말은 여전히 되 새겨볼 경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