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음악

2000년대와 1990년대 대중음악, 그리고 그에 관한 대안

騎虎之勢 2010. 11. 1. 21:58


지금은 2000년대의 후반, 10월이고, 이제 2010년이 되기까지는 불과 2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았다. 2000년대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혹은 그냥 좀 리뷰를 해야겠다는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가요계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음을 글의 시작에 앞서 밝힌다.

 

 

“들을만한 음악이 없다.”

“이제 음악은 배경음악일 뿐이다.”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오토튠의 손놀림이다.”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들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이돌에 열광하고 있는 10대는 강하게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라고 평가받는 90년대(나는 이에 이견이 있다) 음악을 들었던 세대들이 2000년대의 대중음악에 위의 말들처럼 절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가요계에 사람들이 절망하는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핵심적 요인은 새로움에 대한 부재가 아닐까 싶다. 단편적으로 한 부분을 조금 살펴보기로 하자.

 

2000년대 초 중반에 일명 소몰이 창법이라고 불리는 신조어가 생겨나더니, 이때부터 등장하는 모든 신인가수들의 음악장르는 ‘R&B’로 통합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후크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각인되더니, 활동하는 모든 가수들은 후크송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위의 경우는 한 부분만을 본 것이지만, 2000년대 대중음악의 코드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2000년대 대중음악의 코드는 한 마디로 획일화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획일화된 음악의 주된 원인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나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

 


신인 음악인의 부재가 획일화를 이끌어 냈다.
 

정말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거는 진정한 신인 뮤지션이 나오지 않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대중을 사로잡는 새로운 음악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나올 수 있는 뮤지션의 부재는 결국 지금의 대중음악판, 즉 아이돌만이 존재하는 아이돌 전성시대를 배출해냈다.

잠깐 눈을 돌려 90년대로 가보자. 대중음악의 전성기라고 평가되는 90년대는 그 시작부터 매우 남달랐다. 이십대의 나이에 막 접어든 많은 뮤지션들이 정말 거칠 것 없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세의 나이에 동아기획 김영 사장의 눈에 발탁되어 앨범을 발표했던 김현철, 대중음악판 자체를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양분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끼쳤던 서태지, 88년도 대학가요제 1차예선에서 떨어졌지만 무한궤도의 키보디스트로 발탁되더니 후에는 015B로 활동하며 젊은 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정석원. 마지막으로 한국 록을 이끌어나가는 철학적 록커, 신해철을 꼽겠다. (신승훈, 김건모, 이소라, 윤상 등 너무 많은 뮤지션들이 등장했기에 위의 4명으로 한정지은 것을 양해바란다)
 
왜 이랬을까? 왜 하필 90년대에 이렇게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이 한꺼번에 대거 등장했을까? 개인적으로 아마 크게 2가지의 요소가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첫째, 팝 음악.

 

90년대에 등장했던 뮤지션들이 들었던 음악은 가요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팝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였다. 이 무엇을 들어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자신이 들었던 음악은 한 뮤지션의 음악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그의 음악적 완성도의 척도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90년대 조용필을 필두로 해외의 유명 프로듀서, 엔지니어, 세션맨들과 작업한 국내 뮤지션들의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음악적 종착지는 한국의 대중음악의 수준보다 높았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해외 음악가들과의 작업은 필수요소였다.

 

“잊을 수 없는 새로운 음악적 경험이었다”

 

91년도에 출시된 조용필의 13집을 프로듀서한 톰 킨과의 작업 후에, 조용필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국내 최고의 실력파들만이 모인 위대한 탄생을 진두지휘하던 조용필이 새로운 음악적 경험이라는 표현을 쓴 것만 봐도, 90년대 뮤지션들이 추구하던 음악적 종착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과는 격차가 있음을 뼈저리게 알 수 있다.
 


둘째, X세대로 대변되는 젊은 에너지.

 

80년대 민주화의 물결은 90년대까지 이어져 나라, 사회 전체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의 에너지를 만들어 냈고, 거품경제의 정점에 올랐던 90년대 초 중반은 소비문화를 양산했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팝 음악에 눌려있던 가요판을 대중의 앞으로 끌어내었고, 소비문화는 발라드 이외의 다채로운 음악들에게 상업적 성공이라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현재 미국의 소비문화를 만들고, 기성세대와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에너지를 휘날리며 Rock음악과 결합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은 젊은 음악인들이 도전하기에는 최고의 무대였던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수록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2000년대는 90년대에 비해서 많이 모자를 해라는 것을 절감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2000년대는 장르의 획일화가 정말 심각하지만, 뮤지션이 없다는 것이 정말 뼈아프다. 기획사의 힘이 너무 커졌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할 때, 최근의 상황은 정말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에서 대안은 없는가? 나는 신해철의 91년도 발매된 신해철의 Myself앨범에서 상황을 타개할 대안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한지를 말하기에 앞서 Myself앨범을 살펴보도록 하자.



신해철 솔로 2집 – Myself


 


015B의 정석원이 1차 예선에서 떨어진 88년도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이제는 모든 대학생들의 음악이 되어버린 ‘그대에게’를 만든 무한궤도(신해철)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무한궤도는 해체를 맞이하였고, 신해철은 솔로활동을 펼치는 아이돌로 그의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타이틀 곡으로 내세운 그의 솔로 1집은 한 마디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대중적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이제 막 기획사에 들어간 가수에게 자기 하고 싶은 음악을 하게하는 것이 말이 안되긴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1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집에 대한 아쉬움을 신해철은 솔로 2집 Myself앨범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Myself앨범에서 신해철은 랩을 도입하고, 기존의 타이틀곡을 앨범의 전면에 내세웠던 관행을 깨트린 곡의 나열순서 등 실험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실험성이 크다고 하여 앨범의 수록곡들이 대중성과 멀어지지도 않았다.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길 위에서’ 등의 노래들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멜로디 라인은 여전히 매력적인 것을 증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Myself앨범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현재 가요계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위의 음악적 요소가 아니다. Myself앨범의 진정한 의미는 앨범명대로 신해철 개인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신해철은 이 앨범에서 작사, 작곡, 편곡 그리고 연주까지 혼자의 힘으로 해냈다. 즉, One-man band를 실현시킨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이 앨범에서 앨범의 표지, 속지는 물론 글씨체(종합해 아트워크라고 한다)까지 손을 대었다. 정말 혼자서 앨범제작의 대부분을 해내었다. 
 
나는 신해철이 Myself앨범에서 보여준 이 원맨밴드로서의 능력과 앨범의 아트워크까지 어루만지는 자기 음악을 향한 열정이야말로 지금의 대중음악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신인 음악가가 바로 자기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 한국 대중음악계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해철이 Myself앨범에서 보여준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무수한 땀방울을 제발 춤과 연기가 아닌, 자기 음악을 만들려는 태도에 넣어주길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