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도전사
한국이 월드컵 본선무대를 처음 밟은 지 무려 반세기가 지났다. 흐르는 세월 만큼 굴곡도 많았다. 넘어지면서 깨지면서 그리고 가슴을 치면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기기도 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 도전사는 눈물과 한숨으로 아로새겨진 한편의 장편 서사시였다
결국 그 비극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한 4강 기적으로 마침표를 찍긴 했지만, 그렇게 꽃을 피우기까지 흘린 눈물은 강이 되고 바다를 이뤘다. 세기의 전환점에서 극적 반전을 이뤄낸 한국축구는 독일에서 제7막을 열었다. 23명의 태극전사들은 독일에 차려진 멋지고 화려한 연극무대에서 지구촌 관객을 상대로 열연을 펼쳤다. 대한민국과 독일 땅에서 메아리친 ‘붉은 함성’의 응원은 성적에 관계없이 한국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훌륭한 조연이 됐다.
슬픈 역사,어쩌면 더 큰 기쁨을 내리기 위한 신의 조화였는지 모른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열매를 맺기까지 한국축구가 써내려온 영욕의 월드컵 본선 도전사를 되짚어본다.
◇ 제1막 : 부푼 가슴에 피멍을 새기고(1954년 스위스 월드컵)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부푼 가슴이 절망으로 뒤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일본을 1승1무로 따돌리고 월드컵 본선무대를 처음으로 밟은 한국은 지지리도 복이 없었다. 비행기편을 제 때 구하지 못해 경기 하루 전날에야 스위스 땅에 도착한데다 첫 상대가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헝가리였기 때문이다. 푸스카스를 앞세운 ‘매직 마자르(마법의 헝가리)’의 융단폭격은 월드컵 초년생 한국에 9-0 대패라는 쓰라림을 안긴다. 두번째 경기인 터키전에서도 7-0 패배. 두 경기에서 무려 16실점으로 2차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 한국 선수단은 조용히 귀국길에 올랐다. 부풀었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다. 실제로 골키퍼 홍덕영의 가슴엔 빗발치는 상대의 슛을 막느라 시퍼런 멍이 들었다.
◇ 제2막 : 32년만의 화려한 외출(1986년 멕시코 월드컵)
척박한 토양를 뚫고 새싹이 돋기까지 무려 32년이 걸렸다.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4강 도약으로 세계를 향해 기지개를 켠 한국축구는 마침내 86멕시코월드컵 본선 티켓을 거머쥐며 무려 32년만에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다. ‘32년만의 화려한 외출’, 세계는 한국축구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찬사를 보냈다. 비록 1무2패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지만 한국축구의 녹록치 않은 저력을 맘껏 뽐냈다. 3-1로 패한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는 박창선의 기념비적인 월드컵본선 1호축포가 터졌고 김종부는 1-1로 끝난 불가리아전에서 천금의 동점골로 한국에 월드컵 첫 승점을 안겨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우승후보 이탈리아는 혼쭐이 났다. 최순호 허정무의 잇따른 골에 3-2까지 추격당한 끝에 간신히 승리를 지켜냈다. 한국의 월드컵 컴백무대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은 조별리그 세경기를 통해 값진 경험을 축적했다.
◇ 제3막 : 꿈은 사라지고, 벽은 더욱 높아지고(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초의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그러나 세계축구의 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벨기에전 2-0 패,스페인전 3-1 패, 우루과이전 1-0 패.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내리 세판을 지면서 4년 전 타올랐던 희망의 불씨마저 사그라들었다. 척박한 토양을 뚫고 돋아난 ‘가능성의 싹’은 거름을 주고 돌보지 않으면 이내 시들어버린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스페인전에서 터뜨린 황보관의 골이 시속 114㎞짜리 캐논슛으로 화제를 모은 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 제4막 : 고지가 눈앞에 보이고(1994년 미국 월드컵)
전술적으로 도약했다. 비록 2무1패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지만 월드컵 본선무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학구파인 김호 감독이 지휘봉을 쥐면서 고질적인 ‘뻥 축구’에서 탈피하는 동시에 공간개념을 도입해 세계와의 격차를 좁혔다. 2-0으로 뒤지다 종료 5분 전 홍명보와 서정원의 연속골로 2-2로 비긴 스페인전은 적어도 공격력만큼은 세계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볼리비아와의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맞이한 독일전도 인상적이었다. 전반에 세골을 먼저 내줬지만 후반 황선홍 홍명보의 연속골로 3-2로 추격하며 한국축구의 강점인 체력과 스피드를 맘껏 뽐냈다. 다만 한국은 미국월드컵에서 수비 조직력의 보완을 숙제로 남겼다. 공격에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며 세계와의 격차를 좁혔지만 수비에선 여전히 상대에게 공간을 쉽게 침투당하는 조직력의 약점이 번번이 노출됐다.
◇ 제5막 : 또 다시 심연으로(1998년 프랑스 월드컵)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 감독이 지휘봉을 쥔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축구는 또 다시 심연으로 꺼져 들어갔다. ‘차범근 호’는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서부터 불운했다. 하석주가 전반 27분 월드컵 본선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을 터뜨리며 기선을 잡았지만 퇴장당하는 바람에 3-1로 역전패했다. 분위기는 확 가라앉았고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5-0으로 무너지며 차 감독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급기야 대회도중 해임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벨기에전에서 간신히 1-1로 비긴 한국은 그나마 이동국이라는 ‘희망’을 보면서 울분을 달랬다. 그해 5월 16일 자메이카와의 친선 경기로 A매치에 데뷔한 이동국은 네덜란드전 후반 32분 서정원과 교체돼 한국축구 사상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을 세우며 희망으로 떠올랐다.
◇ 제6막 : 태극기 휘날리고, 변방에서 중심으로!!!(2002년 한/일 월드컵)
‘마법사’ 히딩크의 요술로 한국축구가 마침내 기적을 연출했다. 4강! 꿈★은 마침내 이뤄졌다. 세계축구의 변방에서 단박에 중심부로 진입했다. 조별리그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비원의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거둔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독일과의 4강전에서 1-0으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지만 한국이 써내려간 기적의 4강 신화에 지구촌은 열광했다. 히딩크가 뿌린 씨앗은 한국축구의 질적 도약을 이뤄냈다. 히딩크의 지도로 세계축구의 흐름에 조응했고 비디오 분석과 파워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과학적인 훈련기법의 도입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전술적인 진보는 수비에서 두드러졌다. 시대에 뒤처진 스위퍼시스템에서 벗어나 플랫 스리백, 포백으로 수비라인을 뜯어고침으로써 그동안 상대의 공격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던 고질적인 수비불안을 치유했다. 압박축구도 그 정수를 터득했다. 미드필드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면서도 FW-MF-DF 진영이 각각 흐트러지지 않는 데 전력을 다했다. 피나는 반복훈련으로 선수들은 각각의 라인이 깨지지 않고 균형과 간격을 유지하는 ‘블럭화’에 성공했고 유기적인 협력플레이를 마침내 이해하게 됐다. 여기에 전 국민이 하나가 돼 ‘대~한민국’을 목놓아 외친 열광적인 응원은 2002년 한국축구가 ‘붉은 전설’을 이뤄내는 데 크나큰 힘이 됐다.
출처 : http://cafe.naver.com/dreamworld1919/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