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물음과 형이상학
하이데거는「존재와 시간」을 통해 기존의 널리 이해된 형이상학, 존재자를 존재로서 즉, 표상으로서 사유하고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넘어서기 위한 사유 -새로운 형이상학-를 시도하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여기에 결정적으로 걸려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형이상학이 자신의 밑바탕에 계속 등을 돌린 채로 남아있어 인간에 대한 존재의 관련이 이 관련자체의 본질에 의하여 밝혀 지기를 - 여기에서의 밝혀짐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에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 - 거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0절)
“.....그러나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를 Das Sein vorgestellt 언어에로 끌고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존재를 존재 자신의 진리에 있어 사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 진리를 비은폐성 aletheia 으로, 그리고 이 비은폐성을 그 본질에 있어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같은 책, 11절)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로고스(발언)을 그 내용으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a>> 이래로, 존재론 Ontologie 이라는 이름은 형이상학의 본질적 특징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영역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즉, 형이상학의 표상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있어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자성, 본질, ονσια는 그 존재자 자체의 열려밝혀진 진리 aletheia 에 있어 두 가지 표상을 갖는데, 하나는 존재자 자체의 전체를 존재자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에 있어서 표상 (유적표상) 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자 그 자체의 전체를 최고의, 따라서 신적인 존재자의 의미로 표상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이중의 형태의 근거가 형이상학 자신에 있어서는 닫혀 있는, 다시 말해 설명되거나 사유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인 까닭에 그 자신의 본질상 존재의 경험으로부터는 제외되고 있는 셈이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언제나 존재자로서 이미 이 존재자에서부터 드러나 보여진 그것 안에서만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은......이미 스스로를 숨겨버린 그것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같은 책, 20절)
그러나 하이데거에 있어 기존의 형이상학은 통째로 부정해야할 그 무엇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토대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 위에 한 번도 탐험되지 못한 존재자의 존재로서의 사태, 즉 존재의 진리에 대한 사유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이 토대를 ‘기초존재론’ Fundamentalontologie 이라 명명했다.
“거기에서부터 다른 모든 존재론이 비로소 발원할 수 있는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존재와 시간 13절)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에서 1) 세계 관련이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2) 모든 태도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3) 탐구의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을 때 하이데거는 이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해진 것이 사실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연구에서 외면되어진 것,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숙도 없기에, 오히려 없는 것으로 여겨져 온 것, 즉 ‘무’ Nichts 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를 이러저러한 것 ist 로 정의 내리는 것은 자체 모순이다. 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떤 존재적 본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논리학의 사유인데, 이것은 형이상학에 와서 문제가 된다. 그 ‘무’ 란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실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탐구, 즉 “존재자를 그 자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 파악할 수 있게끔 다시 소급해 잡기 위해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이데거 사유의 가장 커다란 의의는 서구적 대상 인식,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는 데카르트적 인식에 대하여 세계를 세계로서, 인간을 그 세계를 이루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체로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 근대 합리주의적 전통의 (근대적 의미에서) 설립자인 데카르트적 사고 방식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인간의 의식에서 따로 분리해 내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만 간주한다. 칸트적 작업은 인간 의식과 사유의 형식에 대한 내적 매커니즘을 세부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로) 그러한 단절 - 주체와 객체의 이원적 대립 -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세계 속에서 이루고 있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관계들의 총체이다. 즉, 인간은 이제 독립적이고 세계에 대해 독립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속의-존재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을 삶으로서 인간을 이러한 삶의 총체로서 파악하는 것. 하이데거는 ‘무’를 ‘존재로서 헌성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울러 “존재 없이는 모든 존재자가 다 무존재성 속에 남아있는 것, 그리고 이 존재의 알수 없는, 아직 전개되지 않은 본질이 우리에게 본질적인 불안 속에서 무를 보내고 있는 것”(보탬말, 45-46절)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이 ‘무’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배재되어 왔던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 - 라는 개념 또한 현-존재 Da-sein, 즉 인간의 실존 Extentia 과 연관지어 이해되어야 한다. ‘없음’이란 실은 없다고 하는 속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무엇에 대한 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다시 말해 하이데거 사유의 핵심, 즉 무로서 표상한 존재 자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형이상학의 구상,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연구되지 못한 존재자체에 대한 탐구를 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의 전체성 Totality 속에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무엇에 대한 ‘무’라면, 반대로 인간이 근원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그러한 상태, ‘없음’의 상태에서 ‘있음’의 상태로의 미끌어짐(하이데거식 용어로 표현하자면)이 아닐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 사상과 더불어 적어도 그 만큼의 의의를 지닌 사유가 아닌가?
하이데거는 ‘때때로 드러나는’ 이러한 불안, ‘무’에 대한 불안, 즉 존재 자체에 대한 불인식성에서 오는 인간의 근본적 불안이 이와 같은 탐구의 원동력임을 밝히고 있다. 즉 ‘없음/무/표상’가 ‘있음/유/본질’의 결핍임과 동시에 그러한 결핍을 극복할 수 있는 본질적인 추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혹은 불안)은 오직 인간, 현-존재 Da-sein 만이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존재의 열려있음에로 나가 끝까지 견뎌 냄으로써 그 열려있음 속에 서 있는다. 이러한 견딤이 곧 ‘염려’이다. 현존재의 탈자적인 본질은 염려에서 시작되며, 염려는 오직 염려의 탈자적 본질에서만 충분하게 경험된다.
“...이러한 무존재성 또한 존재의 진리에 존재가 결코 존재자 없이는 현성할 수 없음이, 존재자가 결코 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이 속한다면, 존재 이탈자로서 다시금 아무것도 아닌 무가 아니다.” (같은 책, 46절)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근거위에서만 인간의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수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수 있다. ” (35절)
“현-존재란 무 속으로 들어가서 in das Nichts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35절)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의 열려 밝혀진 진리 aletheia 는 과연 무엇인가? 존재 Das Sein 라는 개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어떤 사태나 존재 이전에, 선험적으로 a priori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인식/파악/이해 하고자 할 때 이미 그에 앞서 주어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 Das Sein 는 존재자에 대한 탐구 속에서는 결코 있는 그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말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하이데거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현존재에 대한 분석,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론을 제시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계속된 문제의식 속에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지칭하는 대상성의 문제를 넘어, 그러한 물음들에 있어 요구되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론으로서의 현존재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시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현존재라고 이름 짓는 그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로서 시간성이 제시될 것이다. 이러한 제시는 잠정적으로 드러내 보인 현존재의 구조들을 시간성의 양태로 반복하여 해석함으로써 자신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존재와 시간」5절)
그런데 이렇게 시간성에 현존재의 의미를 포개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존재 일반의 의미(전체에서 그 자체에서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우리는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란 하나의 토대이자 디딤돌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존재의 진리에 대한 앞선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존재의 진리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것 Das Wesende des Seins 으로서 존재 자신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7절)
앞서 ‘존재’를 존재자 이전에 미리 제시되어 있는 본질적인 무엇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그러한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것, 존재의 진리를 지시하는 것, 비은폐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는 기존 형이상학에서의 시간개념이 한 번도 사유하지 못한 것일뿐더러 결코 사유될 수도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하여「존재와 시간」은, 존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나란히 존재자에 앞서는 존재의 근원적인 전제,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전제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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