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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대중문화 시원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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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자라는 추상적 어휘가 모든 이 세상의 모든 약자를 대표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는 무수한 약자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으로서의 약자성, 남자로서의 약자성, 자영업자로서의 약자성 등등. 더구나 이를 판가름하는 기준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상대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의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앞서 언급한 다양한 약자성을 약자성을 모두 다 포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즉, 이들이 표방하는 약자성은 그 약자성이라는 어휘의 추상성에 기대어 어떤 특정한 계층을 대변하는 창구의 역할에 불과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들 말대로 그들의 행동이 이 세상을 진보하게 만드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면, 이 세상에 산재하는 모든 이들의 다양한 약자성을 수용하고 그들의 요구들을 전반적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이 세상이 정말로 진보할 수 있을텐데.


  그래서 지금 진보라고 자처하는 모든 운동권 세력들의 약자성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그들이 표방하는 약자성이 결코 모든 약자성을 포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이 표방하는 약자성은 특정한 여성으로서의 약자성 또는, 노동자인데 그 노동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동자는 아니다. 보통, 현 한국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나 자영업자,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특정 대기업의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로서의 약자성과 같은 특정한 정파적 약자성을 대변한다.  그리고 여성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여성은 아니다. 보통, 현 한국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성과 함께 자신의 위치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현 한국사회에 도저히 적응할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는 이기적 약자성을 가진 일부 여성의 정파적 약자성을 대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표방하는 약자성은 결코 모든 약자들을 대변할 수 없다. 그로 인해 그들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결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들이 표방하는 약자성 프로파간다에 기대어 사회의 방향성을 여기에 맞춰 놓는다면 즉 이들이 표방하는 약자성은 어떤 특정한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로써 단순히 어떤 특정한 정파가 기득권이 되느냐 아니면, 그 동안 일상적으로 잘 살아왔던 특정 부류들이 그들의 권리를 잃느냐와 같은 특정 정파와 정파 간에 권력 구도를 재편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약자성에 대한 논리로서 모든 것이 접근하게 되면은 그들이 표방하는 이 사회의 진보 또한 있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사회 발전은 특정한 전파의 목소리만 대변하게 되어 이 사회에 어떤 포용적인 측면이나 다양성에 대한 측면을 역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가 지금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다양성이다.

즉, 포용적 마인드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적 마인드는 즉 이 세상의 다양한 약자성을 대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즉 단순히 어느 정파적 입장의 이익을 대변하자기보다 두루두루 일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어려움이 무엇인가? 이들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고 그런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시장 논리에 근거해서 해결할 수 있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시장 논리에 의해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란, 그들에게 어떤 응당의 비중을 할당한다기 보다 그들의 처해진 여건, 그들이 가진 여건으로만으로도 그 시장에서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제도적이나 사회적 여건적 측면으로서 실현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서도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약자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향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하는 게 보수의 역할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본인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패배적 마인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요즘의 보수의 역할인 것이다.


  그래야 이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써 '약자성'이라는 추상적인 어휘가 저연스레 소멸되어 이 사회는 실질적으로 건강해지고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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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자사고는 실패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상 존재하는 것은 "낭비 "  불과하다. 원래 자사고는 영미권 사립학교를 모델로 하고 교육당국의 “재정지원 없이” 교육당국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율적인 학교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다양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겠다는 취지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본래 이명박 정부 때에도 당초에 자사고를 5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교육은 백년대계' 라는 말이 있듯이, 그만큼 교육정책은 호흡을 가지고 신중하게 집행했어야 했는데, 이것이 “한시적”이었다는 점은 그대로 진정성 있는 교육정책의 집행이 아니라, 치적 쌓기의 성패를 가늠해보는 교육 '실험' 불과했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2014 자사고 재지정 평가 분석 결과, 전국 자사고 25개교 17개교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자사고 설립이 ‘진정성을 가지고 신중하게 집행한’ 교육정책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애초에 자사고 ‘설립 목적'에는  다양한 교육수요 충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자사고가 입시 교육 기관으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래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자사고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물론, '목적사업비' 라는 명목으로 재정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징수할 수 있는 명분이 갖추어진 관계로, 등록금이 비싸다고 해당 자사고 측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어렵다. 이로 인해 학업성적이 좋은 학생이라도 비싼 학비 때문에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함으로 인해 균등한 교육적 권리 보장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애초에 '다양한 교육수요 충족' 이라는 근본적인 설립 목적은 안중에도 없었고,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다는 핑계로 비싼 학비 징수로 인해 균등한 교육적 권리 침해의 원인만 제공하는 현재의 자사고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는 커녕, 교육의 양극화만 부추기고 말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애초에 자사고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은 "낭비 "에  불과하다.

 

 

** 불펌 금지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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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하면 떠오르는 첫 인상은 역시 이다. 왜냐하면, 요즘의 위정자들과 여러 대중매체에서 나부끼는 경제 살리기 열풍은 결국, 우리 국민들 호주머니 사정이 궁핍해서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경제를 살리게 되면, 그만큼 우리 호주머니 사정은 풍족해질 수 있다고 하는 위정자와 대중매체들의 막연한 주장으로 인해,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 뇌리에는 경제 = 이라는 도식이 각인되어졌다. 물론, 필자 또한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렇게 믿어왔다. 마치 유서 깊은 역사유적에 쓰여진 고문(古文)인 것 인양.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면
, 경제를 살리는 것은 곧,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생산직이건 사무직이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간에 너나할 것 없이 다들 돈 버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보다. 그러나 줄기차게 야근을 해도, 쉬지 않고 잔업을 해도, 우리의 살림살이는 현재,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주변에서 논귀의 개구리처럼 그토록 떠들어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비법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 살리기 = 이윤 창출이라는 그 단순하면서도 굳건한 논리는 헛소리에 불과했던 것인가. 경제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경제라는 개념어의 사전적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려 한다.


경제의 사전적 의미는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추구하는 것
, 그 중에서도 희소성 있는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경제라는 용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이라는 뜻에서 출발하여 확장된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경제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분배한다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경제는 이윤 창출이 아닌, 자원의 분배를 주목적으로 하는 분야이다. 쉴 새 없이 이익을 창출했는데도 우리가 궁핍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의 의미를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개념에 대해 오해하고 있으면 필경
, 그 개념을 잘못 사용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부류가 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에 의해 계도(啓導)”의 대상으로 전락된다. 물론, 그들이 선의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말 그대로 진정한 계도가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도의 대상에서 더욱 추락한, “이용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앞서 밝혔던 위정자와 대중매체들이 보여준, 경제에 대한 모호한 설명은 어쩌면, 후자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껏 오해해 왔던
경제의 의미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에 대한 세부적인 방법론적 논의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경세제민에 있다.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인식한 연후에 다음 논의를 시작하자. 사용목적이 분명히 파악되고 나서, 그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우리가 그것조차도 모르는 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헤매어 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말이 새삼 필자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by 서성경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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