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조그마한 단상
죽음이라는 것. 참으로 아리송한 개념임에 틀림없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도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의(定義)는 정의내린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천차만별이며, 정작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다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스럽다. 때론 두렵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아무도 죽음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므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 자신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의미도 자의적으로나마 규정할 수 있다. 삶을 통하여 본 죽음.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판단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이다. 즉, 죽음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삶의 종착점으로서의 죽음, 그것이다.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일반적 양태는 다음과 같이 축약된다. <A = 지혜로운 삶을 지향하며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B = 자연을 가까이하고 그의 도리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며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C = 생존 그 자체에 매달리는 삶을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비록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각기 다르지만, 이러한 죽음 양태들의 근본적 의미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모두 "삶의 끝"으로서 맞이하는 죽음의 유형들인 것이다. 단지, 그 끝을 향해 어떻게 내달리고자 하는지, 또는 어떻게 내달렸는지에 대한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 논점을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어떻게 하면 훌륭한, 또는 후회 없는 삶의 끝을 맞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옮기고자 한다. 이 문장을 좀 더 명료하게 하면, “어떻게 훌륭한 삶, 후회 없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로 압축된다. 이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기에 앞서, 궁극적으로 얻어가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 우선, “후회 없는 삶”이라는 말 그 자체에 접근해 보자. 후회 없는 삶. 이것은 그만큼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잘 살아왔으므로 미련 없이 삶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또한 이 말은, 자신이 자신의 삶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도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C 양태는 일단, 후회 없는 삶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명된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러한 죽음을 곁에서 마주할때, 이별의 아쉬움 보다는 비통한 감정이 먼저 고개를 들게된다.
그러므로 필자의 생각은 이로써 보다 명확해진다. 그 생각은 타자에 의해 사자(死者)가 후회 없는 삶을 마친 것으로 평가되는 죽음, 그것에 기인한다. 우리는 삶의 종착역인 죽음으로 그냥 내달리지는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할까? 이 고민을 끝없이 단 채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에 충실히 임하는 삶을 산 사람이 결국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 “무엇”을 "나와 타인들 모두가 진정으로 경애(敬愛)하는 행위"로 규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신이 죽음에 임했을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슬픔 그 자체의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해 살다 간 사자의 행적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 그 아쉬움 때문에 사자의 죽음을 슬퍼하도록 해야 한다. 그 아쉬움이 곧, 사자의 삶이 후회 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내세가 존재하는 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다. 하지만 내세의 유무를 떠나서도 영속성은 존재한다. 사자의 이름, 그리고 그 사람의 행적. 이것이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아쉬움과 그리움에 의한 기억으로 이어져,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A 양태처럼, 지혜를 탐구하는 철인(哲人)이 되어 죽음을 맞이해도 좋고, B 양태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그와 함께하는 죽음을 지향해도 좋다. 단지, 그와 같은 삶의 태도의 차이는 당사자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를 아쉬움으로써 애도하는 주변인들의 범위를 결정해줄 뿐이다. A, B의 경우는 각각 A, B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사자(死者)의 기억을 영원히 지속시켜 주는 것이다. 당연히, 아예 주변인들의 뇌리에 남지 않는 죽음 보다는 낫다. 또한, 나쁜 기억으로 주변인들의 뇌리에 남는 죽음보다도 낫다. 물론,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로 이 두 개의 후자를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써 주변인들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규모와 방법의 제약을 떠나서- 나와 타인들 모두가 진정으로 경애(敬愛)하는 행위를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이 주변인들의 기억으로 인한,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죽음의 궁극적 목표이다.
필자는 가치 있는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닌 끝"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육체는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들이 기념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끝맺지 못하는 죽음, 바로 그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정의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좋은 의미의 결과로 달성하기 위해, 이 사회에서 자신과 관계맺는 타인들을 위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칸트는 그의 저서, 역사철학에서 “나는 단지 나아지기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타자를 위해 살아가며 죽음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나아지기 위해” 한다.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며, 영원히 주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의미로서 기억되기 위해서. 그 범위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말이다.
글쓴이 : 서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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