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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대중문화 騎虎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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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자사고는 실패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상 존재하는 것은 "낭비 "  불과하다. 원래 자사고는 영미권 사립학교를 모델로 하고 교육당국의 “재정지원 없이” 교육당국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율적인 학교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다양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겠다는 취지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본래 이명박 정부 때에도 당초에 자사고를 5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교육은 백년대계' 라는 말이 있듯이, 그만큼 교육정책은 호흡을 가지고 신중하게 집행했어야 했는데, 이것이 “한시적”이었다는 점은 그대로 진정성 있는 교육정책의 집행이 아니라, 치적 쌓기의 성패를 가늠해보는 교육 '실험' 불과했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2014 자사고 재지정 평가 분석 결과, 전국 자사고 25개교 17개교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자사고 설립이 ‘진정성을 가지고 신중하게 집행한’ 교육정책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애초에 자사고 ‘설립 목적'에는  다양한 교육수요 충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자사고가 입시 교육 기관으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래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자사고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물론, '목적사업비' 라는 명목으로 재정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징수할 수 있는 명분이 갖추어진 관계로, 등록금이 비싸다고 해당 자사고 측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어렵다. 이로 인해 학업성적이 좋은 학생이라도 비싼 학비 때문에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함으로 인해 균등한 교육적 권리 보장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애초에 '다양한 교육수요 충족' 이라는 근본적인 설립 목적은 안중에도 없었고, 정부의 재정지원이 없다는 핑계로 비싼 학비 징수로 인해 균등한 교육적 권리 침해의 원인만 제공하는 현재의 자사고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는 커녕, 교육의 양극화만 부추기고 말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애초에 자사고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은 "낭비 "에  불과하다.

 

 

** 불펌 금지합니다!!

Posted by 騎虎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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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상징' 로레알의 베일 속 두 얼굴

 

환경친화 내세우나 유해물질 사용 여전

과장 광고, 제왕적 경영 방식도 비판받아

 

 

  100년 전에 설립된 프랑스 기업 로레알은 요즘 분위기가 약간 뒤숭숭하다. 우선 경제위기로 인해 과거에 비해 매출이 신통치 않아서다. 또한 사진작가 프랑수아 마리 바니에에게 9억9300만 유로를 기부한 로레알의 사주 릴리안 베탕쿠르에 대해 그의 딸이 금치산 선고를 신청했다. 어머니가 심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가운데 기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딸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네슬레도 로레알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 자,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밀스러운 거대 기업 로레알 속으로 들어가보자.

 

  “좌파 시대든 우파 시대든 독재 권력 아래에서 화장품이 금지되거나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니 충격적입니다. 소련의 화장법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18년 동안 로레알 최고경영자를 맡으며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린지 오언존스가 했던 말이다. 이는 크림이나 샴푸를 파는 일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OJ(오언존스를 지칭하는 유명한 말)는 아주 일찌감치 중국 시장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중국 여성들이 마오의 붉은 책 대신 붉은색 립스틱을 가지고 다니게 될 거라고 했죠.” 로레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여성의 말이다.

 

  그의 이런 장담은 얼마 후 실현되었다. 1997년 베이징에서 오언존스가 중국어로 ‘전 소중하니까요’라고 적힌 거대한 광고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것이다. 또한 로레알은 지난해 세계 화장품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이집트, 카자흐스탄, 파키스탄에 지사를 열어 현재 130개국에 진출한 상태며, 자사의 브랜드(로레알 파리)는 물론 그동안 인수한 프랑스 브랜드(가르니에, 돕, 믹사, 비시, 라로슈포제, 비오템, 랑콤, 카샤렐, 이브생로랑 보테…)와 외국 브랜드(메이블린, 키엘, 슈에무라, 헬레나 루빈스타인, 랠프 로렌, 조르지오 아르마니, 미니너스, 콜로라마, 소프트신·카슨…)를 판매하고 있다.

 

  2008년에 로레알은 20년 동안 유지하던 그 유명한 ‘두 자리 성장률’을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순이익만 해도 20억 유로를 거둬들였다. 오언존스가 최고경영자직을 맡을 당시 로레알의 매출액은 37억 유로에서 145억 유로로 급등했고 주식 시가총액도 15억 유로에서 500억 유로로 늘어났다. 2006년부터 오언존스는 로레알의 회장을, 장폴 아공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소비 미덕과 함께 고속 성장

 

  잠시 로레알의 역사를 살펴보자. 파리 출신의 화학자 유진 슈엘러는 1907년에 새로운 염색법을 개발해 회사 L’Auréale(로레알)을 창설했고 2년 후 회사명 철자를 ‘L’Or?al’로 바꾸었다. 현재 86세인 릴리안 베탕쿠르는 아버지 슈엘러가 남긴 유산 덕에 세계 최고 갑부 여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가진 재산액은 134억 달러로 추정된다. 로레알은 그룹이 프랑스와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수록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 예로 로레알의 경영진 이름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오언존스는 오랫동안 파리 증시 40개 상장 기업(CAC 40)의 최고경영자 중 최고의 수입을 올린 이로 남아 있었으며(기본 연봉만 해도 720만 유로까지), 2007년 잡지 <챌린지>의 집계를 보면 장폴 아공은 유럽에서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는 경영자였다(아공은 올해 1300만 유로를 받았는데 이 중 400만 유로는 연봉으로, 900만 유로는 스톡옵션으로 받았다). 4월 주주총회에서 장폴 아공은 유럽의 공장 세 곳을 폐쇄하기로 했다며 2009년도 스톡옵션은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수갈채 속에서 오언존스 회장은 최고경영자 아공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법도 개인의 사적인 판단을 대신할 수 없을 겁니다.”

 

  로레알 본사는 파리 외곽 클뤼시에 있다. 유진 슈엘러가 1928년에 인수했다가 2년 뒤 미국 기업 프록터앤드갬블에 다시 넘긴 기업 ‘몽사봉’(Monsavon) 사무실이 서 있던 곳에 지어진 갈색 돌 빌딩이 바로 로레알 본사 건물이다. 로레알은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로레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미래의 웰빙을 약속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더구나 웰빙은 소비사회의 성장으로 꾸준히 그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로레알의 시각으로 보면 여성해방은 헤어스프레이 얼네트와 탈취제 프린틸의 판매 증진을 가져온다.

 

  상당히 가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프랑수아 달(2005년에 사망)은 1957년에서 1985년까지 로레알을 이끌며 자본주의는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때만 정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였다. 그는 일을 하면서 가치를 창조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늘 품었다.

 

이익 위해선 허위·과장 광고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해 자신만만해진 로레알은 진지하고 객관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과학의 권위를 자사의 이미지에 활용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로레알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연구소들이 일종의 내부 견제 세력이고 마케팅에 미친 사람들과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며 꿋꿋하게 윤리를 실천해가는 곳이라며 존경을 표했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명은 날카롭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냉소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기초 연구가 마케팅 문구에 많은 기여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죠.” 로레알 제품 광고들을 보면 주름 하나 없는 비현실적인 모델들이 등장하고 ‘좀 있어 보이는’ 도표, 숫자, 그래프가 동원된다. 로레알은 영국, 미국, 헝가리에서 광고 감시 기구 혹은 소비자 단체들과 맞부딪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로레알은 3월에 헝가리에서 허위 광고로 50만 유로 벌금형을 받은 전례도 있다. 그나마 프랑스가 로레알에 관대한 편이다.

 

  화장품 대기업 로레알은 현대과학에 기여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예산 1억8천만 유로를 투입한 프랑스 최초 민간 자선 기구 베탕쿠르·슈엘러 재단과 같은 로레알의 재단은 여러 연구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로레알은 매년 유네스코와 함께하는 ‘여성과 과학을 위한’ 프로그램에 따라 전세계 여성 연구원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그리고 선정된 여성 연구원들의 얼굴이 신문과 잡지 광고 면들을 가득 채운다. 오언존스는 여성 연구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성 연구원들은 알 수 없지만 짜릿한 즐거움을 주는 미래이며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해주는 존재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환경이 하나같이 어둡고 회의적인 상황에서 여성 연구원들은 그만큼 많은 위안을 주죠.” 여기서 잠시 2009년에 테일러넬슨소프레 연구소가 의뢰를 받아 10개국을 대상으로 과학의 인식에 대해 실시한 앙케트 조사를 살펴보자. 이 조사를 통해 과학에 대한 문제가 역설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과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과학의 잠재적인 힘을 이해하게 해줄 정보가 없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이런 인식은 힘을 잃는다.” 이렇게 되면 과학적인 주장이 언젠가는 평판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 않을까?

 

동물실험으로 악명 얻어

 

  로레알은 여론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1975년 인터뷰에서 프랑수아 달은 민간 기업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의무 중에서 동물실험을 거친 제품이 해롭지 않음을 보장할 의무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뒤 로레알은 동물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기업으로 찍히며 제품 보이콧 운동에 부닥쳤다. 로레알 역사상 가장 진땀나는 위기 중 하나가 찾아온 것이었다. 2003년에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로레알이 프랑스를 부추겨 화장품을 위한 동물실험을 금지하는 유럽연합 지침 채택을 늦추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 지침은 2009년 3월부터 발효 중이다. 현재 로레알은 인공 피부 개발에 나서며 동물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나 동물실험이 의무 조항인 중국 같은 국가들에도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로레알은 또 다른 새로운 인식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 처지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연구가들은 화장품에 들어 있는 몇 가지 화학물질, 특히 파라벤이 암을 유발하거나 내분비 체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발표에 사람들은 바이오 제품으로 대거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바이오 제품은 화장품 분야의 새로운 엘도라도로 떠오르게 되었다. 로레알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2006년에 영국의 ‘보디숍’과 프랑스 바이오 브랜드 ‘사노플로르’를 인수했다. 특히 보디숍은 ‘윤리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이미지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로레알은 ‘지속 가능한 개발’에 초점을 맞춰 집중적인 홍보를 하고 있으며 인도 뭄바이 인근 푸네(Pune)에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지렁이와 태양열판을 이용하는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화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스위스의 식품 다국적기업 네슬레를 주주로 두고 있는 로레알 같은 기업에 그린워싱(기업들이 환경친화적 이미지를 갖기 위해 하는 행동)은 곧바로 한계를 드러낸다. 더구나 페터 브라베크 네슬레 대표는 “유전자 변형이 바이오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확신한다.

 

  <화장품의 진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독일 기자 리타 스티엔스는 이렇게 말한다. “로레알 파리는 끝없이 새로운 제품이라는 것으로 시장을 채우지만 제가 보기에는 늘 똑같은 제품입니다. 실리콘, 저렴한 미네랄 오일, 아크릴레이트, 에틸렌디아민사초산(EDTA)으로 이루어진 제품이죠.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고요.” 리타 스티엔스 기자는 건강과 환경에 위험해 보이는 화장품 성분이 많다고 한다.

 

내용 변함없는 새 상품 쏟아내

 

  더구나 로레알 노조도 자사 화장품을 만지고 다룰 때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노조는 지난 3월 안전한 화장품을 위한 새 유럽 규정이 통과하기 전에 염색 제품(로레알은 여러 염색 제품 계열을 판매하고 있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여러 연구를 보면 미용실 근무자들은 습진, 알레르기, 혹은 천식 같은 문제를 호소한다고 한다. 미용실 근무자들은 경영진에게 건강을 해치지 않는 좀더 안전한 제품을 서둘러 연구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밖에 우려되는 문제가 또 있다. 로레알은 제왕적인 성격의 강경한 경영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오언존스 회장은 로레알에 ‘OJ’ 왕국을 세웠다. 당연히 임원진과 노동자들은 큰 압력을 받고 있다. 로레알은 전세계에 40곳의 공장을 두고 있는데 이 중 20곳은 유럽에 있다. 2월에 장폴 아공 최고 경영자는 채용을 동결한다고 발표해 눈총을 받았다. “2004~2007년에 프랑스 공장 12곳은 직원 12%가 해고되었지만 수익률은 14% 상승했습니다.”

 

  로레알 유럽위원회의 프랑스민주노동총연맹(CFDT) 쪽 대표 필리프 보댕의 말이다. 이런 강경 정책에 스트레스는 나날이 높아진다. 경영진은 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경한 경영정책을 펴는 거라고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008년 순이익도 여전히 상당하고(20억 유로) 주주들에게 가는 배당금도 상승해 무려 8억6200만 유로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에 비해 1900만 유로 오른 금액이다. 2007년 당시 순이익은 26억 유로였다. 그런데도 미국에서는 500명이, 보디숍에서는 275명이 해고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웨일스, 모나코, 스페인에 있는 공장 세 곳을 2011년까지 폐쇄한다고 한다.

 

  2008년 2월, 더 이상 회사 이익을 위해 소모품으로 이용당할 수 없다며 로레알에 근무하는 프랑스 직원 1만2천 명이 파업을 했다. 이들은 전반적인 봉급 인상을 다시 요구했다. 2004년에 전체 봉급 인상 요구가 있긴 했지만 무산되고 대신 개별적인 봉급 인상으로 사태가 마무리된 적이 있다. “경영진이 기업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저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봉급 인상률은 겨우 1.5%에 그치고 있습니다.” 필리프 보댕 대표가 말했다.

 

  한편 배당 정책(2002년부터 배당금은 모두 두 배로 늘었다)을 지속하고 싶어하던 경영진은 4월에 결의안을 주주총회에 부쳤다. 변함없이 함께하는 주주들이 2012년부터 배당금 10%를 인상해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결의안이었다. ‘경기가 불안정한 시기에는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주주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현명한 처사다.’ 오언존스가 2008년 보고서에 쓴 글이다. 그러나 로레알 최고 노조인 간부직 총연맹(CFE-CGC)의 조르주 리아로카피 위원은 이런 처사 뒤에는 다른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로레알이 자사 주식을 재매입해 처분하는 정책은 오히려 주요 주주들, 즉 베탕쿠르 가문의 힘과 네슬레 그룹의 지배권을 키워주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는 주주는 제대로 대우해주고 싶지만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는 주주가 그냥 앉아서 이익을 얻도록 할 수는 없죠.” 리아로카피가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30년간 로레알은 매년 9억4100만 유로와 13억 유로 사이의 금액을 이런 자사주 관련 정책에 투입했고 약 5500만 주를 처분하고 있다.

 

 

모나 숄레 Mona Chollet 著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월호 발췌 / 한겨레 2009.06.1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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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모(24)씨와 권모(24)씨는 모두 1984년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학생이며 남자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김씨의 아버지는 서울대 출신 대학교수다. 어릴 때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던 김씨는 주변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대에 합격했다. 전공은 경영학이지만, 법을 공부해 기업 간 M&A 전문가가 되고 싶어 사법시험을 치렀다. 현재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그간 미뤄둔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사법연수원과 군 복무 기간을 고려하면 그가 사회에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상위계층이 될 초석은 마련한 셈이다.

  김씨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바로 그해에 지방대 학생인 권씨는 군에서 제대했다. 사회의 따스한 환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앞에 놓인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혹했다. 부모의 사업이 망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막연히 복학을 생각하고 있던 권씨는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휴학 기간을 연장했다. 집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의대생은 등록금 걱정 안 한다?

 

  매일같이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기저기 발품도 팔았지만, 자격증이나 특별한 기술 없는 대학 휴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전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했고 지금은 사설경비업체에서 일한다. 야근이 잦고 근무도 힘들지만 시급은 고작 3500원. 자기 계발은커녕 먹고살기도 벅차다. 또래 친구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스펙(취업 준비생들의 학점·이력·영어시험 점수 등을 일컫는 은어)’을 쌓고 있지만 권씨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요? 용은 고사하고 지렁이 한 마리도 못 나오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지방 국립대에 재학 중인 차승호(23)씨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에요. 그냥 당연한 거죠. 요즘처럼 사교육비가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시대에는 돈 많은 집안 아들딸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또 명문대생은 과외로 손쉽게 돈 벌어서 어학연수도 다녀와 스펙도 쌓고, 결국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러잖아요. 그에 반해 돈 없는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죠.”

  언뜻 들어도 차씨의 말은 사회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 사회계층은 전적으로 경제적 자원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등 복합적인 요소들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는 대학생 사회의 계층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생의 계층화에 대해 성지훈(25·한국외대 2년)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사회에나 계층 분화는 존재하고 대학사회도 예외일 수는 없죠. 다만 대학생이라는 집단이 가지는 특수성은 있겠죠. 학교 간판의 차이 정도? 그 밖에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나 성별은 일반 사회에서나 대학사회에서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의대가 가장 인기 있는 학과로 자리 잡은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고소득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의대의 경쟁률은 해마다 살인적인 수준. 2008년 대입 수시 2학기에서 고려대 의예과는 무려 16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근래 대부분의 의대가 의학대학원으로 바뀌면서 학부과정에 의대를 남겨놓은 대학이 줄었기 때문에 문은 더욱 좁아졌다. 당연히 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수재 중에서도 수재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들 의대생은 사회적으로 어떤 계층에 속할까. “까마득한 선배들은 주말에 막노동을 해서 등록금을 벌었다는 ‘전설’도 얘기하지만, 그건 정말 옛날 일이죠. 올해로 5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그런 경우는 못 봤는데요.” 올해 본과 3학년으로 올라가는 방종욱(24·인제대 의대)씨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성적은 좋은데 등록금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학생은 애초에 의대에 오질 않아요. 학비가 싼 국립대나 교대로 가죠. 의대 등록금이 다른 학과보다 비싸잖아요. 더구나 요즘엔 잘사는 애들이 공부도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뉴스에도 나오잖아요. 강남 출신 학생들이 타 지역에 비해 서울대에 더 많이 들어간다고요. 실제로 주변 의대생들 보면 대부분 등록금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살아요.

  특히 의대는 본과 3학년에 올라가기 석 달 전부터 은행에서 2000만원쯤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돈 때문에 휴학하는 일은 거의 없죠.”

  실제로 치의대 본과 3학년부터는 하나은행으로부터 2000만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다. 신한은행은 본과 4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비슷한 상품을 판다. 방씨는 “거의 모든 의대생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한다”며 “만들어서 손해 볼 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발급받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등록금을 대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그런 사례는 극소수라는 게 학생들의 말이다. 대부분은 술값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흥비로 사용된다는 것. 방씨는 “주변을 보면 생일처럼 특별한 날에는 술값으로 100만원, 200만원씩 쓰는 이들이 있다”며 “이럴 때 마이너스 통장을 쓴다”고 말했다.

  무담보 대출이긴 하지만 결국 빚이 아니냐는 질문에 방씨는 이렇게 답했다. “학생 시절에 빌린 돈을 못 갚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턴, 레지던트 끝나고 개인병원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진 빚은 못 갚는 경우도 간혹 있다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죠. 의대생들이 대개 유복한 가정 출신이고 학교를 다닐 때도 경제적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건 분명합니다. 마이너스 통장이 있으니 디지털 카메라나 DVD 같은 전자기기를 사거나 여행을 갈 때도 부담 없잖아요. 의대생들은 높은 점수로 대학에 진학했고 학업 과정도 타 전공에 비해 힘들기 때문에 보상도 많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요즘 의대 졸업생이 많아져서 벌이가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는데요, 그렇지만 선배들 말 들어보면 전문의 따서 사회에 나가면 기본적으로 연봉 6000~7000만원은 보장된다고 하네요. 학부 때 마이너스 통장으로 빌린 돈이나 학자금 대출받은 것은 그때 다 갚을 수 있는 거죠. 다른 과 대학생들은 이자가 부담되서 학자금 대출도 선뜻 못 받는다고 하지만, 의대생은 그런 부담이 없습니다.”

 

입시와 돈의 상관관계

 

  지난해 서울대에 입학한 양진환(20)씨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사교육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그 어렵다는 서울대 입시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입학 후에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동기들을 보며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언론에서 수능 만점자들을 인터뷰하면 꼭 ‘교과서 위주로, 학원은 안 다녔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꼭 그런 경우였거든요. 근데 주위 친구들은 학원도 많이 다녔고 과외도 많이 받았어요. 특히 영어 실력은 사교육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더라고요. 저를 비롯해 학교 공부만 충실히 했던 학생들은 수능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죠. 하지만 동기 중에는 어릴 때 영어권 국가에서 1년쯤 살다 온 경우도 많아요. 물론 대부분 집이 잘살죠. 어쩌겠어요. 이제부터 따라잡아야죠.”

사교육이 대학입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2007년 8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사교육의 효과, 수요 및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는 사교육 효과가 미미하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되는 박소영(19·아주대 사회과학대학 입학 예정)씨는 “과외 선생님에게 개별 교습을 받거나 보습학원을 다니는 학생이 주변에 많지만 성적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교육이 성적 향상에 필수적인지 여부는 차치한다 해도, 그간 사교육 시장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의 KDI 보고서는 연간 25%의 비율로 가계별 사교육비가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소비지출 상위 10%의 한 달 사교육비가 하위 10%의 8배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계층화 현상이 통계숫자로 명확히 입증된 것이다.

  교과서만을 공부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시대는 지나갔고, 개인과외, 보습학원, 조기유학까지 엄청난 사교육비가 필요하며, 이를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한국 사회의 정설이다. 사교육비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녀 뒷바라지에 만신창이가 된 학부모를 기다리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대학 등록금 고지서다. 부산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정재웅(24)씨의 말을 들어보자.

 

같은 ‘88만원 세대’라지만...

 

  “평균적인 가정을 생각해봅시다. 자녀가 두 명 정도 있겠죠. 한국에는 국립대가 적으니까 자녀가 모두 사립대를 가는 경우가 많을 거고, 그러면 두 자녀 한 학기 등록금만 1000만원입니다.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는 학교는 드무니 수혜자가 되는 경우는 예외로 봐야겠죠. 요즘은 어학연수도 가야 하고요. 이 정도 경제적 부담을 견뎌낼 수 있는 부모가 한국에 많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생이 학비나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지만, 과외라는 ‘황금 알바’는 오로지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명문대생 차지죠. 지방대생이 한 달 내내 서빙해야 벌 수 있는 돈을 그 친구들은 과외 두 건으로 손에 넣죠. 명문대생들은 과외로 돈을 벌면서도 토익이나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같은 88만원 세대라도 노동시간이 다르죠.”

  역시 지방대에 재학 중인 정가람(24)씨는 군 복무를 마친 후 지난 가을에 복학할 수 있었지만 다시 휴학했다. 등록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까도 생각했지만 쉽게 돈이 모이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시간대가 맞는 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설사 구하더라도 생활비밖에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보면 다섯 명 중 한 명은 돈을 벌려고 휴학해요. 이유는 다 다르겠죠. 어학연수를 가려는 학생도 있고, 저처럼 등록금 벌려고 휴학하는 학생도 있죠. 그런데 이렇게 휴학을 하다 보면 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져요. 별다른 기술이 없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뻔해 경력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결국은 시간만 빼앗기는 거죠.”

  반면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모(25)씨의 경우를 보자. 대학 입학 후 꾸준히 중고생 과외 지도를 해온 그는 대학원에 진학한 지금도 한 달에 한두 건의 과외지도를 한다. 두 건을 하면 생활비를 제하고도 저축할 여유까지 생긴다.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어 좋다. 대개 주 2회, 월 30만~40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2만원 내외다. 2008년 새로 책정된 최저임금 3770원보다 네 배 이상 많다. 이보다 많이 받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서 등록금 때문에 휴학하는 친구는 찾기 어려워요. 서울대 학생들은 과외만 해도 등록금 마련에 문제가 없거든요. 물론 예전보다 과외 구하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구하게 되더라고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대학생 과외를 허용한 이후 이전까지 비밀리에 행해지던 대학생 과외는 이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가는 올랐지만 ‘시세’는 10년째 거의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과외를 꼭 부잣집 아이들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외 비용이 여전히 보습학원보다 더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학부모들이 과외교사를 구할 때 신경을 더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 ‘명판’은 학부모들이 과외 선생을 구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다. 당연히 명문대 재학생이 유리하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에 재학 중인 이모(24)씨는 “우리 학교도 명문대에 속하지만, 학부모들은 ‘스카이’를 선호한다. 인맥이 아니라 중개업소를 통해 과외교사 자리를 구한다면 스카이가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귀띔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과외재벌’도 생겨났다. 올해 스물넷인 H씨가 대표적이다. 서울의 명문대 재학생인 그는 현재 월 20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린다. 연봉으로 따지면 2억원이 넘는 셈이다.

“과외 덕분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많이 벌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제가 상근예비역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 퇴근 후에 시간이 나잖아요. 그때부터 과외를 시작했는데 규모가 커져서 제대할 때쯤에는 40명 정도를 가르치게 됐어요.”

  현재 H씨는 과외로 모은 돈을 자본금 삼아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인수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제가 잘 가르쳐서 소문이 난 덕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학교 명판 덕이었죠. 솔직히 말해 제가 지방대 학생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많은 부모가 저를 믿고 자식을 맡겼을까요?”

 

공무원 시험 열풍의 진짜 이유

 

  물론 H씨 사례는 극소수에 속한다. 그 사이 대부분의 20대들은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든다. 총 2888명을 선발한 지난해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무려 64.6대 1이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노동이 유연화하면서 정년이 보장되고 보수도 괜찮은 공무원에 대한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지난해 경쟁률을 근거로 추산하면 올해 3357명을 모집할 예정인 9급 공채에는 20만명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자가 폭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정적인 직장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를 맞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 당시 넥타이 부대들의 퇴출과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사춘기를 보낸 요즘 대학생들은 ‘공무원이야말로 최고의 직장’이라는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 또한 만만찮게 작용한다. 현재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24·상명대)씨의 말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제일 문제죠.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그에 비해 공무원 시험은 초기에 학원비랑 교재비 빼면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어요.”

  지난해 전역한 후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 강모(23)씨는 또 다른 이유를 들려줬다. “주요 대기업이 서울에 몰려 있다 보니, 지방대생이 취업에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대 재학생은 서류전형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요. 공유할 정보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채용과정이 투명한 공무원 시험에 지방대생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죠.”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지방 출신 학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국외대에 재학 중인 감모(24)씨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가 고교 재학 때 이미 부산대나 경북대 같은 상위권 지방 국립대에 가는 것보다 서울소재 중하위권 대학을 나오는 게 낫다는 말이 있었어요.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면 공무원밖에 할 게 없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돈이 좀 더 들더라도 무리해서 서울소재 대학에 지원한 거죠.”

  요즘 고등학생들은 지방 출신 학생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인(in)서울’이라고 표현한다. 인서울 여부가 대입의 성패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감씨는 인서울에 성공했지만 연고 없이 대학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등록금에 집세며 생활비가 버겁기만 했다. 그는 학교에서 행정을 돕는 일과 번역 아르바이트, 과외를 하며 월 80만원 정도를 벌고 있다.

 

“아비투스가 달라요”

 

  “고시생은 아니지만 고시원에서 살아요. 학교 앞 원룸은 월세가 40만~50만원이나 하잖아요. 웬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죠. 지금 살고 있는 방은 책상 하나에 저 혼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전부지만, 그것도 방세가 달마다 23만원이에요. 상경해서 느낀 건데, 서울에 집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더라고요. 빨리 졸업해서 돈 벌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지방에 있는 친구들은 서울서 학교 다닌다고 부러워하지만, 전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그네들이 오히려 부럽죠.”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에 진학한 채모(25)씨. 지난해 대기업 취업에 고배를 마시고 지금은 중간 규모의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다. 채씨는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지방에서 성장한 학생과 서울에서 성장한 학생은 ‘아비투스’가 다르다”고 말했다. 아비투스(habitus)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용한 개념으로, 개인마다 성장하면서 지니게 되는 계층적 권력 차이를 일컫는다.

  “개인의 아비투스는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한국의 경우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굉장히 심한 편이죠. 권력의 집중도가 다른 곳에서 성장한다면 개인의 아비투스도 달라질 수밖에 없죠.

  취업을 준비하면서 보니 서울 출신은 취업도 비교적 잘해요. 거기엔 사회적 인맥 차이가 작용할 겁니다. 서울에 터전을 가진 이들은 친척 중에 대기업 간부나 정부 고위관료가 꼭 한 명씩 있더라고요. 인맥이 당락을 좌우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인맥이 정보의 양에서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취업이 더 쉽다는 의미예요.”

  요컨대,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위계적 질서를 가진 ‘차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생 한 방의 꿈

 

  서두에 등장한 권씨. 어젯밤 야근을 했는지 목이 잠긴 채 전화를 받았다. “희망이 있느냐고요? 당연히 없죠.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아요. 희망과 절망이 모두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러니 인생에 감동도 없고요. 그냥 살아가는 거죠.”

  이유를 물었다. 이런 답이 돌아온다. “저를 포함해 사람들은 모두 ‘위’를 향한 욕구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된다 된다 말들은 하는데, 사실은 안 돼요. TV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은 그런 사례가 드무니까 나오는 거죠. 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로 못 올라갈 거란 말입니다. 계층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거든요.

  집에 돈도 없고 학교 이름도 별로 안 좋은 저로서는 ‘인생 한 방’을 되뇔 수밖에요. 오늘도 로또 2000원치를 사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출처 : 新東亞

Posted by 騎虎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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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 교수 著

1.

  책은 과거 문명의 총아였다. 책은 시각중심의 문명이다.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고 관조하는 삶의 전형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영상매체의 시대다. 영상매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단연 촉각이 시각보다 우선한다. 촉각적인 감수성이 시각적 이미지를 앞선다.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촉각 중심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그 차이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로 비유한다. 연극배우는 직접 관객 앞에서 자기 배역을 소화한다. 그는 관객과 호흡하면서 돌발 상황에도 대처해야 한다. 관객의 표정을 살피고 연기의 흐름과 강약을 스스로 조절한다. 연극의 독특한 맛을 연기자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배우는 관객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의 표정을 살펴 연기의 흐름을 조절하지 않는다.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배역을 소화한다. 각각의 시퀀스는 전문 편집자의 손으로 손질된다. 배우는 시사회에서 관객의 최종 평가를 기다린다.

 

  시각중심, 촉각중심의 문화에서 관객의 태도 또한 다르다. 연극의 관객은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작중인물을 이해한다. 관객 입장에서 기자의 모든 제스처와 연기는 부분보다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들이다. 관객은 연기자와 호흡하고 자기감정을 토로하고, 생각에 잠길 수 있다. 행위들을 보고 작중인물의 성격을 평가한다. 영화의 관객은 사뭇 다르다. 카메라는 배우의 연기를 확대한다. 불현듯 배우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세세한 변화를 추적한다. 배우가 자기배역을 통제할 수 없듯이. 관객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따라가야 한다. 시퀀스의 연속성은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촉각의 감수성은 작중인물을 평가하기도 전에 다른 이미지를 따라가도록 종용한다. 이때 시각의 비평적 위치가 촉각의 감상적 지위에 굴복한다. 생각이 즉각적인 반응에 자리를 내어준다. 몸의 느낌이 머리의 생각보다 앞선다.

 

  늘 변화의 중심에는 주역이 있기 마련이다. 촉각중심의 문명은 산업과학기술의 획기적 발달에 힘입고 있다. 라디오의 묘미는 감정표현은 느리지만 돌이켜볼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물론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는 타인에 의지하고 타인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마실, 사랑방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키워드다. 휴대폰, 인터넷, 엠피쓰리, 아이폰으로 이어지는 현대문명에서는 발명품이 보여주고 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알아낸 자료에 합리적인 설명을 부여하고, 그것이 곧 이야기로 소통된다. 그런 탓에 모든 사람은 문명의 발명품에 나타난 아바타 같은 인물이 되고자 갈망한다. 문명의 소비자인 대중은 이런 변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술을 터득한다. 컴맹, 기계치는 문명의 이기를 향유할 줄 모르는 루저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각 개인은 자기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드러내려고 혈안이 된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스쳐 지나간 이미지에 숨겨진 암호들도 예리한 감수성으로 읽어낸다. 새로운 감수성은 자기표현의 방식도 바꾼다. 획일적인 추상명사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특한 형용사,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충실하게 드러내려고 한다. 곧 감각이 자기이다. 여기에는 다양성, 다원주의라는 정치적 수사들이 늘 따라다닌다. 우리 시대는 풍요로운 감수성의 시대이다. 새로운 음식의 맛을 탐하는 미식가처럼 아직 느끼지 못한 오묘한 맛을 찾아 나선다.

 

  세상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이러한 감수성의 문명, 다양성의 문화는 풍요로움의 산물이다. 다양성을 존중할 줄 아는 체제에서 자라난 결실이다. 상큼한 사과는 비옥한 토양과 따뜻한 볕이 필요하다. 모래밭이나 그늘진 곳에서 탐스러운 사과를 기대할 수 없다. 문명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풍요의 산물처럼 다양한 감수성과 정치관을 즐기지만, 환경과 체제의 갑작스런 변화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예리하던 촉수도 작동하지 않는다. 무뎌지는 감수성에 무력감이 덮친다. 변화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성공은 나의 패배처럼 들린다. 자기만의 개성은 일순간 보릿자루마냥 내팽겨진다. 대신 자기 자신의 실존이 무겁게 다가온다.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그랬다. 카페에서 예술, 진리, 인생을 논하던 그들에게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과 패배감이 덮쳤다. 그들의 유일한 비상구는 자기 자신의 믿음이었다. 유한한 삶을 개척하는 진정성이었다.

 

  지금 대학생은 촉각중심의 세대이다. 참고 견디는 인내의 미덕보다 자기표현의 진솔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표현은 큰 장점이다. 경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항상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야심만만한 세대이다. 그러나 세계의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닌 당장 생존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의 심정이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 전투로 향하는 심정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분명 야심만만한 세대는 이 전투에서 이길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세대임을 소리치고 유감없이 그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불청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커져가는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묘책이 있는가? 21세기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대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새로운 도전에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보고 싶은 물음이다.

 

2.

  대학생활은 늘 해방감으로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울타리를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간섭 없이 생각대로 마음껏 하고 싶은 자유가 먼저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소망은 있다. 누구나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은 욕망은 있다.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싶은 욕망.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서 찾은 이유와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싶은 욕망. 스스로 결정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은 욕망. 스스로 목표와 계획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욕망 덩어리가 인간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자유가 없다. 인간만이 자유를 갖고 향유한다.

 

  자유가 문제이다.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아직 충분하지 않는 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유 자체를 완벽하게 실현시키지 못한다. 생각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방식을 바꿀 뿐이다. 조선시대의 선조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보라! 분명 우리의 후손들도 자유를 꿈꿀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과학문명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를 꿈꾸고 실현시킬 수 있다. 문명의 도구는 자유의 속박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문명을 오용하는 자도 사람이다. 자유만이 자유를 속박하고 허용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 그 역설은 물질적 풍요를 자유의 실현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다. 우리는 자유의 속박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든지 자유를 속박하는 기술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현 세대는 산업과학기술에 친숙하다. 현 세대는 과학을 부릴 줄 알고, 더 전진시킬 줄 안다. 아버지는 컴맹이지만, 아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낚을 줄 안다. 과학기술에 너무 젖으면 만성화되는 위험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비판의 촉수를 잊어버리듯이, 비판하길 꺼려한다. 없으면 불편할 뿐이다. 과학의 풍요는 자기 자신의 문제도 기술의 문제를 풀 듯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다. 상황도 중요하지 않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양질의 토양이 아니면 꽃 봉우리는 결코 피어나지 못한다. 안 되면 다른 곳에서 하면 되는데 라는 식으로 도피처를 찾는다. 역사적 조건은 그렇지 못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숨 푹 자고 깨어나도 여전히 똑같다. 현실은 꿈이 아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이 평범한 사실이 인간의 조건인 셈이다.

 

  현 세대에게도 이 역사적 조건이 있다.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서 있는 땅, 그 조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과 관조는 이 조건을 벗어나는 꿈과 같다. 각박한 현실을 벗어날 비전인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라면 이 땅을 축축하고 생기 있게 할 하늘과 태양을 보는 것이다. 막연한 느낌은 비전을 가질 수 없다. 느낌은 육신의 감각에 민감할 뿐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따뜻함을 그리워할 뿐이다. 땅의 온기를 찾아다닐 뿐 왜 그런지, 어떤 대안이 있는지 모른다.

 

  대학생활도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행동과 말을 가능하게 한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조건에 갇힌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서 여전히 묻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왜 강의를 듣는가? 취업을 위해서? 취업은 결과이지 목적일 수 없다. 인생의 황금기에 이 좁은 공간에 갇힌 이유가 무엇인가? 목적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계속 질문을 던지자. 왜 사는가? 왜 공부하는가? 왜 이 사회는 우리에게 간섭이 많은가? 사회는 무엇인가?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풀리는 게 없다. 에라, 모르겠다. 마음껏 즐겨보자. 이런 기분으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3.

  현대사회의 역사적 조건은 특이하다. 자유가 무한정 허용되는 듯하면서도, 막상 그 자유는 항상 막다른 골목에서 내린 필연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내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상실된다. 무력감만 커져간다. 왠지 모르게 자꾸 주눅이 든다. 타인을 친구로 보지 않는다. 타인은 그저 나의 경쟁대상일 뿐이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오직 나만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현대인은 개인들로 쪼개져 있다. 서로를 연대시켜 줄 공통의 것이 없다. 찰스 테일러는 이런 현상을 “개인의 파편화 과정”이라 불렀다. 현대사회의 불안은 여기에 있다. 현대사회는 무리 짓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의 사회다. 무리 지움을 일종의 속박으로 여기고 있다. 파편화는 끝이 없다. 자꾸 내면으로 도망간다. 또 다른 이면의 공간으로 달아난다. 개인의 내면은 유일한 안식처다. 자기 세계에서 영원히 꿈을 꾸듯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타인이 지옥이라 말한 사르트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 모두는 타인을 품지 않고 자기의 작은 세계에 만족하고 있다.

 

  자기 세계에 갇히는 건 삶에 안주하는 동시에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편한 사람만 만나고 편한 말만 하는 세상은 사람냄새가 점점 사라진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그저 몇 사람만 알고 죽는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남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타인은 정말 지옥인가? 나를 도와주고 꿈을 꾸게 하고, 같이 행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는 아닐까? 현대인에게 ‘연대’는 낯선 말이다. 마치 골동품에 피어난 푸른 녹처럼 느껴진다. 자기를 벗어나 남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남도 나다. 나처럼 그도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다. 나처럼 자기 자신의 것을 갖고 싶고, 친구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진정성의 참뜻은 결국 서로의 인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진정성을 확인할 공통의미가 무뎌진 세상에 살고 있다. 공통의미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이상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이 공통공간은 말하자면 말과 행동을 통한 합심의 공간이다. 서로 선의의 경쟁 안에서만 생겨난다. 서로 자신의 독특성을 보여주고, 인정할 때 존재하고 유지된다. 그 의미의 상실은 내 작은 세계로의 회귀이다. 근원적 불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의 기분처럼 말이다.

 

  88만원 세대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다. 뿔뿔이 흩어지면 남는 것은 개인의 자족공간이고, 이 공간은 늘 타인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자기 진정성은 원자처럼 단순화된 개인의 자질로 평가되지 않는다. 타인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평가받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의 공간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되고, 새로운 공통성을 찾는 데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88만원 세대라는 집단적 평가에 앞서서 스스로는 완벽한 인격체이고 가능성이다. 대학생활에 허용된 것은 삶의 이해관계에 얽매임이 아니라 그 해방이다. 물론 개인의 이해가 전혀 없을 순 없다. 그럼에도 대학은 이해에 얽힌 집단이 아닌, 뜻을 공유하려는 희망의 집단이다. 뜻이 통하는 친구들. 철학자들은 이런 뜻의 공동체를 우애의 공동체(philia)라고 불렀다. 이런 공동체에는 정의도 필요하지 않다.

 

  혹자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현실을 모른다 폄하할 것이다. 맞다. 분명 이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상의 힘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상 없는 사회는 늘 현실에 수긍하는 사회이다. 싸워야 할 어떤 당위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을 꿈꾸는 사회는 다르다. 그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않고 현실과 싸운다. 적어도 도전한다. 현실과 이상의 팽팽한 긴장. 이것이 젊은 세대가 누릴 특권이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좋은 기회다.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을 찾는 것이다.

 

4.

  자기 자신의 것을 만드는 것. 삶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탈을 꿈꿔야 한다.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자기만으로 감수성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안에서 다른 것을 보여주는 능력을 중요시했다. 특히 이야기하는 능력을 매우 특별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야기를 꾸밀 수 있는 것은 자기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자기만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일탈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향유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대학 시기는 이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적합한 시간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당장 현실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기 시간을 허용 받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찾아가는 시간이라 생각하자. 일탈을 꿈꾸는 여유를 허용 받은 것이다. 창조적 일탈을 위한 시간이다. 이것이 젊음의 특권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 창조적 힘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창조적 힘은 지능이 아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면서 터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습관적 행동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창조적 힘은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과 관련 있다.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자기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 개방은 알려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질문이 없으면 모든 것이 그게 그거다. 그러나 물으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알았던 기존 관점의 맹목성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대중들의 관점을 의심하고 홀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는 전체의 시각이 필요하다. 전체의 시각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은 생각이 자라는 뿌리이다. 시련은 생각을 키우는 반작용의 힘이다. 생각하는 지성은 관념을 키우고 관념은 행동의 힘을 키운다. 적어도 자기 진정성은 행동하는 힘이다. 행동하는 힘은 세상의 제도를 바꾼다.

 

  관념의 유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념은 절망을 좌절로 만들 수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은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상상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현실을 창조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그래서 가능성의 열정은 필연성에 우선해야 한다. 희망은 이 가능성의 힘, 새로운 삶을 위한 기대를 가리킨다. 내 희망, 우리 희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일깨우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희망, 이 어두운 시대의 등불이다.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이 원색적인 회의에 이제 답할 차례다.

 

5.

  예부터 책읽기는 대학생활의 특권으로 여겨왔다. 책읽기는 옛사람을 만나고 동시대인을 만나는 카페이다. 책읽기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미팅장소다. 책읽기는 곤욕스럽다. 항상 인내와 끈기를 요구한다. 타인의 경험을 읽어내는 일은 오랜 시간과 끝 모를 이해를 필요로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단호하게 평가하긴 쉬어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감각적인 기쁨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는 과정은 묘한 즐거움을 준다. 지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꿈틀거림은 자기 자신의 활동 자체가 아닐까?

 

  즐거움은 일종의 창조적인 반응이다. 거북스러운 일도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힘들수록 그 희열은 커지듯이, 이전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은 값진 것이다. 고전 읽기는 천재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꼭 고전을 읽어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냥 즐길 수 있는 책을 읽어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맞다. 책을 읽는다는 데는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것은 생각하는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단지 시간 때우기 라면 무슨 책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알 수 없는 길을 가는 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알아야 할 때가 많다.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둠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캄캄하다. 그러나 익숙한 어둠은 얼마든지 헤쳐 간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번 생각한 것은 묘한 힘을 지닌다. 한 번 생각한 것은 닥치면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일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새롭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겠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에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낯섦도 맞부딪치다보면 친숙해진다. 낯섦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뜻밖의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만족하지 않는 것은 놀라움이다. 놀라움은 새로움을 배우는 디딤돌이다. 놀라움은 신비스런 능력이 아니다. 가까이에 있어 친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갑작스런 낯섦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주위의 모든 것, 내 삶, 내 존재를 느끼게 한다. 되풀이가 아닌 항상 새로움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의 삶은 일종의 도약대이다. 일상의 관점을 넘어 진정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학생활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 허용된 시간에 값진 것을 찾는 것. 살아있는 징표를 찾는 것. 회의라는 무기를 마음껏 이용하는 것. 아직은 삶이 남아있다고 외치는 것. 젊음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구세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 감히 알려고 하자.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칸트의 말은 여전히 되 새겨볼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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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x <자본론> 1권-上, 제2편의 내용을 중심으로 -


 
  통상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문제시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익을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제 자신을 혐오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많아지기를 은근히 바라면서도 돈을 많이 가진 다른 사람에게는 원인 모를 분노와 냉대의 감정을 갖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단 한 마디의 사자성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다. 물론, 필자가 애꿎은 지면을 빌어 이 글을 쓸 이유 또한 없다.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측면의 문제일까?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각 개인에게는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결방법이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폭력”

 

  Marx가 언급했던 M-C-M' 혹은 M-M' 구조는 현대 경제체제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등가물의 교환을 통한 사용가치의 담보를 말하기에는 지금의 경제구조가 매우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잉여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앞서 때로는 호의적인 것처럼, 때로는 악의적인 것처럼 언급했던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 이익의 그 양면성은 즉, 이를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일 텐데, 그 한가운데에는 Marx가 언급했던 대로, “자본”이 존재한다. 이러한 논리에 기대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익은 “자본을 어떻게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정당성이 가려지는 셈이다. 결국 수단과 방법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구조적 총체가 우리가 보통 언급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역시 정당성의 문제는 그 해결의 과정, 즉 수단과 방법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이분(二分)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을 “발전시키는” 행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로. 이를 효율성의 문제와 연관시켜도 좋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족적 상품 생산의 고리에서 벗어나 “자본”의 특성을 먼저 깨닫고 이를 활용한다면, 이는 자신의 본래적 이익 추구의 방법을 “혁신”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타인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은 분명 전통적인 수단과 방법을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단지, 언어적 사용의 미묘한 차이일 뿐일까? 아니면, 정당성을 가리는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일까?

 

  롤즈가 제기한 우연성의 문제는 자본 그 이후의 상황에 국한될 것이다. 즉, “태생적”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른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분화지점에서 그 접합점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칸트가 제기한 사회성과 반사회성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고 거시적이다. 그리고 사회성과 반사회성은 정당성의 문제가 아닌, 요소적 개념이다. 어쨌든, 이 단순하게 보이는 정당성의 문제들은 이제껏 이데올로기 자체를 양분(兩分)하는 이념으로 확장되어왔다. 그 양분은 어찌됐건, 태고적 논의와 다를 바 없이 보이던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문제가 대대로 평행선을 그어왔음을 의미한다.

 

  쉽게 생각하려 하는가? 아니면, 어렵게 숙고하려 하는가? 쉽게 생각하려 한다면, 답은 매우 간단하다.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는 수밖에. 지금이라도 현 세태에 불만이 있다면, 화염병을 들고 청와대 또는 정부청사에 난입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필자도 이를 굳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만큼 솔직한 인간이 또 어디 있으랴. 단지, 사회 구성원이라는 직함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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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적인 것”과 “사(私)적인 것”, 이 둘 중 어느 것에 더 무게를 두어야할까?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공적인 것에 더 무게중심을 두어야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적인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일단, “모두”를 위한 그 어떤 것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이 대답의 자리를 대신한다. 사적인 것을 지닌 사적 개인들이 모두 공유하고자 하는 가치가 바로 공적인 것일 테니까. 그러면, 그 어떤 것을 지향하는 모두는 바로 공적 개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의 구성원들은 분명히 단순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집합체 또한, 아닐 것이다. 무작위로 구성한 것과 다름없는 필부필부들이 어떻게 가치관의 공유를 "쉽게" 이루어 낼 수 있겠는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즈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무지(無知)의 베일"이라는 사유실험을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적 가치를 수립하는 과정을 논증해보였다. 사회 구성원들은 마치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서로에 대한 정보에 무지하며,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는 선악 개념과 같은 일반 원칙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따른 두려움으로 인해, 타인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들이 거머쥘 수 있는 최소한의 이익을 목표로 설정한다. 즉 공적 가치는 그러한 그들의 보수적인 선택에 기초하여 수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적 가치 수립과정의 중심에는 타인을 "의식하는" 각자의 행위가 존재한다. 각 개인이 궁극적으로 소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각기 타인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즉 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에 따른 결과가 과연 유리할지에 대한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래서 각 개인은 과감하게 유리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단지, 불리함을 피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이 모두가 “타인”이라는 존재에 의해 가능한 행동양식이다. 여기에서 상호성(相互性)이 성립된다. 그리고 합의의 공간이 비로소 열린다.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들과의 충돌 보다는 소통이 더욱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10조), 사생활의 자유(17조), 양심의 자유(19조) 등은 이러한 상호성의 특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각자 가지고 있던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의 타협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즉 내가 자유를 얻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 또한 인정해야 하고, 내가 존엄해지고 싶으면, 타인의 존엄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개인의 생각들이 합의를 통해 더욱 단단해졌고, 이를 명문화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곧 헌법이다.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헌법 조항들이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대한 증거물이 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려고 하는 행위가 타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는 타인에 의해 마련된다. 교원노조의 명단을 공개하기를 원한다면, 교원노조 또한 그의 필요성을 공유할 때, 비로소 명단 공개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알 권리”라는 것을 내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알 권리는 나와 타인이 직접적으로 맺는 관계의 성격에 의해서 규정된다. 교원노조와 그 밖의 사람들 간에 직접적으로 맺는 관계의 근거는 그럼 무엇인가? 교육 활동, 바로 그것이다. 교원노조와 그 밖의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는 교사와 학부모, 혹은 교사와 학생, 이 이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이 관계 내에서 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교육 활동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는 서울남부지법이 “명단 공개는 학생의 학습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경계를 분명히 지정하였다.

 

  교원노조의 명단 공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공적인 것”의 존중과 “알 권리”였다. 하지만 상호성을 무시한 공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범위를 무시한 알 권리 또한 존재 가능하지 않다. 상호성에 근거하여 아래에서 위로 수립되는 공적 가치를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그들. 그들에 있어서 “공공성”은 대체 어떠한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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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 레즈비언. 이 말을 듣게 되면 당신은 어떤 느낌부터 드는가? 아니, 전통적으로 종법제도가 뿌리내린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은 너무도 자명할 것이다. 결혼은 곧, 자손 번식을 위한 행위. 이 도식이 굳어져버린 이곳에서는 어떠한 금기도 동성애의 관념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사랑, 그것은 일종의 양념일 뿐이다. 결국 사랑의 결실은 결혼이며, 거의 모두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여기에서는 사랑이 결혼에 우선하는 것이 아닌, 결혼이 사랑에 우선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이러한 결혼관은 “사랑”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마치 규정된 개념처럼 여기게 하였다. 포플러 나무 아래, 수줍은 “선남선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어떠한 난관에 부딪혀도 그들의 사랑을 이어가며, 결국 결혼하여 행복한 가족을 구성한다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애써 자신의 결말 선택지 속에서 삭제하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 선남선녀를 “선남선남” 또는 “선녀선녀”로 슬그머니 바꾸어보라. 어떠한가?

 

  사랑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이 자유롭게 그 구체성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물며, 모든 이들의 자유 보장을 헌법에 명기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오죽할까? 자유라는 이념이 인정된 것은 다원화된 개인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함에 다름 아니다. 즉 모든 사람이 태생적으로 다 동일한 성향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한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성향을 가지기를 “바라는” 전통사회와의 가장 분명한 경계를 형성한다. 과거의 백성과 현대의 시민. 그것은 정해진 이념을 수렴하는 사람과 발산하여 이념을 수립하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다.

 

  다원화된 개인들이 구성하는 이 사회에서, “혐오”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사람이 어떠한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전제하여, 그에 반하는 경우를 목도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바로 “혐오”일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치는 곧 “일반 원칙”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공존하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 일반 원칙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구체적인” 보편적 가치란, 일반 원칙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얼마든지 가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획일화된 봉건사회에서 출발한 보편적 가치가 “상수”라면, 다원화 사회에서 출발한 보편적 가치는 “변수”이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보편적 가치는 이 둘 중에서 과연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모든 사람이 이래야 한다는 사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각기 인정하는 사회이다. 이는 근대라는 질곡을 거치면서, 거침없이 요동치는 변화와 발전을 수용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동성결혼도 그 사회적 변화의 한 양태이다. 그럼에도 단지, 전통적 결혼 관념에 얽매여, 그들의 "다름"을 우리의 "같음"에 억지로 끼워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변화는 발전의 충분조건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변화는 곧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또한, 시대는 분명히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전통과의 불편한 공존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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