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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대중문화 騎虎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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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x <자본론> 1권-上, 제2편의 내용을 중심으로 -


 
  통상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문제시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익을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제 자신을 혐오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많아지기를 은근히 바라면서도 돈을 많이 가진 다른 사람에게는 원인 모를 분노와 냉대의 감정을 갖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단 한 마디의 사자성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다. 물론, 필자가 애꿎은 지면을 빌어 이 글을 쓸 이유 또한 없다.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측면의 문제일까?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각 개인에게는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결방법이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폭력”

 

  Marx가 언급했던 M-C-M' 혹은 M-M' 구조는 현대 경제체제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등가물의 교환을 통한 사용가치의 담보를 말하기에는 지금의 경제구조가 매우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잉여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앞서 때로는 호의적인 것처럼, 때로는 악의적인 것처럼 언급했던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 이익의 그 양면성은 즉, 이를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일 텐데, 그 한가운데에는 Marx가 언급했던 대로, “자본”이 존재한다. 이러한 논리에 기대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익은 “자본을 어떻게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정당성이 가려지는 셈이다. 결국 수단과 방법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의 구조적 총체가 우리가 보통 언급하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역시 정당성의 문제는 그 해결의 과정, 즉 수단과 방법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이분(二分)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을 “발전시키는” 행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로. 이를 효율성의 문제와 연관시켜도 좋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족적 상품 생산의 고리에서 벗어나 “자본”의 특성을 먼저 깨닫고 이를 활용한다면, 이는 자신의 본래적 이익 추구의 방법을 “혁신”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타인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은 분명 전통적인 수단과 방법을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단지, 언어적 사용의 미묘한 차이일 뿐일까? 아니면, 정당성을 가리는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일까?

 

  롤즈가 제기한 우연성의 문제는 자본 그 이후의 상황에 국한될 것이다. 즉, “태생적”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른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분화지점에서 그 접합점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칸트가 제기한 사회성과 반사회성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고 거시적이다. 그리고 사회성과 반사회성은 정당성의 문제가 아닌, 요소적 개념이다. 어쨌든, 이 단순하게 보이는 정당성의 문제들은 이제껏 이데올로기 자체를 양분(兩分)하는 이념으로 확장되어왔다. 그 양분은 어찌됐건, 태고적 논의와 다를 바 없이 보이던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문제가 대대로 평행선을 그어왔음을 의미한다.

 

  쉽게 생각하려 하는가? 아니면, 어렵게 숙고하려 하는가? 쉽게 생각하려 한다면, 답은 매우 간단하다.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는 수밖에. 지금이라도 현 세태에 불만이 있다면, 화염병을 들고 청와대 또는 정부청사에 난입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필자도 이를 굳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만큼 솔직한 인간이 또 어디 있으랴. 단지, 사회 구성원이라는 직함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Posted by 騎虎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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